부현이란 서생이 있었다.
그는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그의 내용을 꽤나 잘 이해하였으며 의학 지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책에만 의존하면서 융통성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점잖은 걸음걸이로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위삼 형을 보셨소?”
한 사람이 위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자 그는 점잖은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찾고 있던 위삼을 만나자 점잖게 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참다못해 위삼이 물었다.
“나를 찾는 이유가 뭐요?”
그제야 부현이 말했다.
“내가 마침 우물 옆을 지나다가 그대의 아이를 보았소.”
“그래서요?”
“그런데 그대 부인이 나무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소.
그리고 아이는 우물 옆에서 놀고 있었는데 무척 걱정이 되더이다.”
“뭐라고요? 그런데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부현이 대답했다. “본디 남녀가 유별하고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 했거늘 내 어찌 부인을 깨울 수 있겠소.
그래서 급히 그대를 찾아온 것이라오.”
위삼이 부현의 변명을 뒤로하고 허둥지둥 뛰어가보니 부인이 우물가에서 엎드려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출간되어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점을 지적하기 위한 발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예수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죽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율법에 얽매여서 진짜로 해야 할 일을 놓쳐버릴 때가 많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다가는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가 올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