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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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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고… 꼬집고… 세기말에 던지는 촌철살인’ 풍자가 뜬다

 

주간동아 1999. 11. 25. 

 

우리 시대에 풍자 문화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무엇인가 빗대 재치 있게 비판한다풍자의 속뜻 그대로 인터넷이나 TV, 연극, 영화 할 것 없이 비틀고, 꼬집고, 흉내 내고, 야유를 보냄으로써 빚어내는 웃음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서점가에서 화제를 모으는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기’(열린 책들 펴냄). 세상을 살짝 비틀어 봄으로써 촌철살인적인 풍자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다. 400쪽이 넘는 볼륨에 에코=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 순위 10위권에 성큼 올라섰다.

 

이 책은 94년 이미 연어와 여행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첫 출간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이번에 독자들이 보인 반응은 가위 폭발적이다. “내용도 보완됐지만 제목이나 부제 자체에서 듬뿍 배어나는 풍자적 이미지가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어 모은 것 같다는 게 출판사 측의 분석이다. 우리 문단에서 풍자와 해학의 달인으로 꼽히는 성 석제 씨의홀림’(문학과 지성사 펴냄) 역시 발간 직후부터 주목받았다. 이 작품에서는 노름꾼, 술꾼, 제비족 등 사회 주변부적인물들이 진지하게 세상의 이치를 논하며 사회를 풍자한다. 지난 7월 발간된 시인 백 주은 씨의 시집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민음사 펴냄)도 만만찮은 풍자적 독설로 눈길을 끈 바 있다.

 

연극계의 영원한 풍자 대상, 셰익스피어 비틀어 보기현상은 세기말 한국에서 역시 여전히 성행했다. 올 가을 무대에 오른 작품만 해도 미친 햄릿’ ‘레이디 맥베스’ ‘햄릿 프로젝트등 수편. 이들은 모두 원작을 정공법으로 표현하는 대신 지금 여기를 표현하기 위한 풍자의 도구로 셰익스피어를 선택한다.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연이은 성공을 거둔 히트제조기 장진 감독. 그를 단순한 스타일 리스트나 발랄한 재주꾼에서 한 발짝 넘어서게 하는 것 역시 그의 풍자 정신이다. 그는 간첩 리철진’ ‘허탕’ ‘아름다운 사인등을 통해 간첩, 죄수, 시체라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입을 빌려 현실의 부조리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가운데일보’? 푸하하

풍자는 슬랩스틱과 더불어 코미디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채용해 온 형식. 개그맨 김 형곤에 의해 80년대부터 시작된 시사 풍자 코미디는 현재 KBS시사터치 코미디파일’, iTV김 형곤 쇼등을 통해 면면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주 이들 프로에서는 가운데 일보’ ‘문 이현 기자를 잘근잘근 씹는가 하면, ‘부자유친’(夫子有親)부자유친’(富者有親)으로 패러디, “평소에 부자와 친해둬야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 삼강오륜등이 등장했다.

 

그 외에도 SBS TV에서는 매일 저녁 8시 40분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캐릭터 나 잘난 박사를 등장시켜 그날의 시사적 이슈를 꼬집는다. ‘진짜 같은 가짜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슬쩍 비꼰 프로그램 진실 게임도 인기. 그러나 TV에 방송되는 코미디나 시트콤 대부분이 한 번씩은 채용하는 양식 패러디, 엄밀한 의미에서 풍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풍자(satire)가 기존에 있던 것을 살짝 비틀고 변형시킴으로써 웃음과 함께 비판의 기능을 한다면, 패러디(parody)는 기존 형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거나 ‘빌려 쓰는 데머문 채 진전한 비판의식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패러디는 그래서, ‘한바탕 웃고 나면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허탈감을 주게 마련이다.

 

풍자의 상대가 시시해진다?

풍자가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을 상대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어째서 세기말, 대한민국에 풍자가 뜨는것일까. 문화평론가 이 성욱 씨의 말을 빌린다면, “풍자는 뻣뻣한(이념적-정치적으로 경직된) 사회일수록 활발히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김 수영시인이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라고 노래한 것이나, 70년대 김 지하가 구리 이순신’ ‘금관의 예수등을 통해 직설법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풍자로 표현해 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결코 당시만큼 뻣뻣하지않은 게 사실이다.

 

김 수영 씨나 김 지하 씨가 권위주의적 정권이라는 단일하고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목숨을 걸 듯 비장하게 풍자했다면, 오늘날은 풍자의 대상도 덜 권위주의적이고 다양하며, 풍자의 형식 역시 훨씬 잡종적이고 해학적이다. 사회적인 경직성은 점차 완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풍자가 대한민국 사회를 풍미하는 이유에 대해 사이버 작가 이 기원 씨는 이렇게 진단한다. “풍자란 작가(생산자)가 목에 핏대를 올리지 않고도 신랄한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도구이자, 독자(수요자) 역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즐거워하며 취할 수 있다. 그만큼 편한비판 방식인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갈수록 완전한 의미의 창조에 대해 비전이나 기대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해 남의 것을 적당히 흉내 내거나 기존의 것을 차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작가 성 석제 씨 역시 풍자의 힘은 풍자하는 대상의 권위력과 비례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풍자 대상은 결코 강고한 권력이 아니다. 대신 현재 예술의 풍자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 분산돼 고질화 된 여러 가지 형태의 모순들이다. 풍자의 방식이나 대상이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이미 풍자는 정점을 지나쳐 내리막 길에 접어든 것 같다. 요즘은 진정한 풍자보다는 오히려 패러디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풍자의 대상들은 너무 시시해져버리고, 굳이 풍자라는 양식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뻔해지지 않았는가! 풍자의 대상이 시시해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그 때문에 나도 앞으론 풍자 양식이 아닌 다른 걸 써야 할 것 같다.” ‘상대가 시시해져서더 이상 풍자할 의욕이 안 생긴다는 성씨의 말은, 풍자거리가 넘치도록 많은,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의 풍자가 불가능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더없이 풍자적으로표현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