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뺀 DJ, 재벌개혁 성공할까???
뉴스플러스 1999. 8. 26.
김대중대통령은 과연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김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사실상 재벌 해체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정권은 유한해도 재벌은 영원하다’는 말에서 보듯 과거 정권과 재벌의 ‘전쟁’에서 승리자는 언제나 재벌이었다. 따라서 과거 정권에서는 적어도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재벌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정경유착 구조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에서의 재벌개혁은 ‘재벌 길들이기’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새 정부 들어 어느 정도 양상이 달라졌다. 특히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보듯 국민의 정부는 재벌문제의 ‘정치적’ 해결 가능성을 배제했다.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은 작년 1년간 다른 그룹들이 그나마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며 ‘정치적’ 해결 가능성을 모색했지만 정부가 선택한 것은 대우그룹 ‘해체’였다. 결국 현재 김대중정부와 재벌 간의 ‘전쟁’은 김대중정부가 이제 겨우 기선을 제압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이를 “아직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라고 표현했다. 나머지 절반은 아직 미흡하다는 것을 김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 총선 앞두고 강공… 실천의지 강해
대통령의 8․15 선언에는 재벌개혁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담겨 있다. 김대통령은 이번에 △ 투명성 제고 △ 상호지급보증 해소 △ 재무구조 개선 △ 업종 전문화 △ 경영진 책임 강화 등 기존의 재벌개혁 5원칙에 세 가지 원칙을 더 추가했다. 산업 자본의 금융 지배 차단, 순환출자를 통한 내부거래 차단, 변칙상속 증여를 통한 경영권 세습 차단이 그것이다. 김대통령은 또 대우그룹을 언급했다. 대우를 직접 거명하지 않고 일부 재벌이라고 표현했지만 투명한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해 ‘제2의 기아사태’와 같은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미진하다고 비판해 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김대통령의 8․15 선언에 대해 일단 지켜보자는 반응이다. “재벌개혁은 실천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김상조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한성대 무역학부 교수)이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 점은 김대통령의 재벌개혁 천명이 16대 총선을 불과 8개월 앞두고 나왔다는 점이다. 재벌들은 그동안 정부의 개혁 압력 속에서도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이 압박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해 왔다. 집권 여당으로서 선거를 앞두고 당연히 재벌의 돈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이런 면에서 보면 김대통령의 재벌 개혁 천명은 하나의 모험이라 할만하고 그만큼 실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재벌들의 긴장도가 여느 때와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재벌 집단이 아닌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세계 초일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라고 언급한 부분을 사실상 ‘재벌 해체의 공식화’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재계는 김대통령의 선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공식 반응은 자제한 채 몸을 낮추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재계의 불만은 그동안 5대 재벌 중 대우그룹을 제외하고는 구조조정 약속을 대체로 지켜 왔음에도 이런 노력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고급 옷로비 의혹사건, 조폐공사 파업유도의혹 사건 등으로 민심 이반이 초래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재벌 때리기’ 차원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마저 보내고 있다. 특히 정부가 강조한 4대 부문 개혁 가운데 공공부문이나 노동부문 개혁 역시 여전히 미진하다는 지적이 많은데도 유독 재벌개혁만 강조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불만이다. 재계는 또 재벌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이를 대체할 만한 비전 제시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재벌이 국제경쟁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마저 스스로 포기한다면 21세기 우리 경제의 미래는 기약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재벌개혁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함에도 이에 대한 대안 제시가 없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라고 지적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의 이번 선언이 지난 1년 6개월간 IMF 위기를 극복해 낸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국정 철학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대중경제론이 71년 대선 이후 김대통령의 일관된 경제철학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대통령이 재벌개혁과 함께 중산층 중심의 경제를 이룩하겠다고 밝힌 것은 대중 경제론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 빅딜 때 재벌 간 감정싸움…‘단합’ 엄두 못내
한 청와대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공평 과세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 철학으로 삼았으나 이에 대해 미국식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이 있었던 점을 고려, 한국적 ‘제3의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또 이번 선언에서 김대통령의 스타일 변화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테제를 먼저 던져놓는 식으로 국가적 과제를 제시했지만 이번에는 ‘생산적 복지’ 정책 등 후속 대책을 미리 마련한 상황에서 국가적 어젠다를 제시했다는 얘기다.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재벌개혁의 핵심 수단은 재벌과 주채권 금융기관 사이에 체결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이었다. 이를 토대로 주채권은행이 재벌의 구조개선 계획 이행을 책임지도록 하고 정부는 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해 온 것이다.
정부가 그동안 직접 재벌개혁에 나서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 목표로 삼은 상황에 힘보다 설득으로 재벌 개혁을 이뤄낸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힘의 논리에 의존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 정부의 재벌개혁은 외줄 타기와 같은 고난도 기술이 요구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재벌, 특히 그 가운데서도 5대 재벌의 시계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는 재벌개혁이 시대적 요구임에도 이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금융감독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이를 두고 “썩은 발가락을 수술하려는 기업 구조조정을 마치 생살을 도려낸 것이라며 반발한 격”이라고 표현했다.
김대중정부 출범 직후 재벌들이 발표한 구조조정 계획은 대표적인 ‘김빼기 작전’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후 재벌이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때마침 새 정부가 강력한 재벌개혁 추진 의지를 천명하자, 재계는 자율적으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는 등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실제로 그들이 발표한 구조조정 계획은 과거 발표를 재탕삼탕 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망하면 한국 경제가 망한다”며 ‘배 째라’식 버티기로 나온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처한 상황에도 막판까지 대우증권을 내놓지 않겠다고 버틴 것도 그런 차원이라고 할 만하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는 재벌의 이런 ‘저항’ 등으로 재벌개혁이 부진했던 것은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참여연대는 재벌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재벌 총수의 세습 독재체제를 타파하고 책임 전문경영체제를 수립하는 게 재벌개혁의 핵심임에도 정부가 그동안 이를 회피하다 보니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 일부선 민심수습용 재벌 때리기 분석도
김대통령의 8․15 선언은 이런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등은 김대통령의 8․15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또 재벌의 세습 경영 체제를 차단하기 위한 상속 증여세 등 세제 분야의 대대적인 개편도 추진하고 있다. 당연히 재벌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특히 5대 재벌 총수들은 그동안 빅딜(대규모 사업 교환) 과정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공동대처’는 생각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금감위 고위 관계자는 이를 두고 “5대 그룹 총수들이 단합했다면 재벌의 저항은 훨씬 더했을 것”이라면서 “원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빅딜이 결과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정부는 재벌과의 전쟁에서 그 어느 때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높다. 그런 점에서 김상조교수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김대통령이 이번에 밝힌 재벌개혁 원칙은 사실 건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초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런 질서 위에서 어떻게 경쟁력과 효율성이 있고 민주적인 기업을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그 기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근로자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번 선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