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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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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

 

시사저널 1999. 8. 26.

 

프로게이머 꿈꾸는 젊은이 많아상금 풍성한 대회 폭증, 미래는 불투명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생 전문대에 다니는 김 아무개 씨(22)는 여름 방학을 맞아 맹훈련에 들어갔다. 그의 훈련 장소는 동네 PC, 훈련 종목은 스타크래프트(게이머들은 스타크라 줄여 부른다). 게임 하나 놓고 무슨 훈련 운운하느냐고? 김 씨에게 스타크래프트는 더 이상 단순 게임이 아니다. 졸업 뒤 진로를 고민하던 김 씨는 지난달 결단을 내렸다. 학벌과 가문이 변변치 않은 자신이 취업 시장을 뚫고 나갈 전망은 불투명했다. 결론은 하나.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자.’ 그 결과 김 씨가 선택한 직종이 프로게이머였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블리자드 사가 주최한 스타크래프트 래더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신주영 씨가국내 프로게이머 1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라는 이름은 생소한 직함이었다.

 

프로게이머는 말 그대로 밥벌이로 게임을 하는 사람.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사정이 바뀌었다. ‘꿈나무를 발탁해 프로게이머로 키우는 PC방과 매니저가 생겨났는가 하면, 프로게이머로 구성된 조직까지 생겼다 프로게이머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PC방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1짜리 아들 때문에 속을 끓이던 서 아무개 씨(42)는, 요즘 들어 아이가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돈 많이 벌어다 드릴 테니 나를 너무 핍박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기성세대가 게임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있다. 프로게이머 신주영 씨 매니저를 맡고 있는 임영수 씨(28․청오정보통신 마케팅팀장)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우리 애가 게임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프로게이머로 키워 줄 수 없느냐는 전화가 걸려온다고 말했다.

 

우승 상금 최고 3천만 원

그렇다면 프로게이머라는 사이버시대 신종 유망 직업이 과연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얼핏 보아 대답은 긍정적이다. 지난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인터넷 게임 대회는 여름 방학을 맞아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동네 PC방이나 특정 대학지방자치단체에서 101백만 원 상금을 내걸고 주최하는 게임 대회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전국 규모의 굵직한 게임 대회만도 45개에 이른다. 전국 규모의 대회에는 적게는 2천 명, 많게는 1만 명에 이르는 게이머가 몰려든다. 이들 대회의 우승 상금은 보통 1천만 원을 웃돈다. 특히 8월 1~15일 벌어진 스포츠서울컵 대회는 스타크래프트 개인전 우승 상금이 3천만 원(총 상금 1억 3천만 원)으로, 역대 최고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게임 대회에 가 보면 프로게이머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여느 프로 세계처럼 여기서도 실력만이 존재를 증명한다.

 

스포츠서울컵 대회 서울 지역 결선에 오른 ㄱ군(분당 중앙고)은 평소 유닛(병사) 다루는 솜씨가 예술의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해 왔던 김동준 씨가 같은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존경하는 형의 플레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것이 권군의 말이다. 게임 대회가 열리는 동안 이른바 양민(일반 게이머)’들은 좋아하는 고수가 참가한 게임을 따라다니며 인터넷에 열심히 관전평을 올린다. 개중에는 게임 속 백병전에서 밀리는 고수를 보며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분투하던 한국군의 비애가 생각났다’ 거나, 유닛(병사) 수십 마리가 떼 지어 적진으로 몰려가는 모습에서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을 연상했다는, 귀여운 허풍이 섞인 관전평도 있다. 이쯤 되면 프로게이머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는 듯하다.

 

급증하는 게임 대회, 풍성한 상금,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는 팬의 존재.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라는 것이 게임업계 안팎의 지적이다. 어떤 이들은 서슴없이 프로게이머 거품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먼저, 현행 게임 대회가 특정 종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게임 대회의 절대다수는 스타크래프트에 의해,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레인보우 6><FIFA 99>를 게임 종목으로 내건 곳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스타크래프트를 주된 종목으로 놓고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끼워 넣은 수준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사그라든 뒤에도 대규모 게임 대회가 과연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정보통신부가 인정한 것처럼, 불과 1년 반 사이 4천여 개 PC방이 전국에 퍼진 배경에는 스타크래프트가 있었다.

 

확장 팩인 블루드 워를 포함해 무려 55만여 카피가 팔려 나갔다는 이 최대 히트 게임, 그러나 언제까지 인기를 유지할 수는 없다. 최근 게임 대회가 부쩍 늘어난 이면에 교묘한 상술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PC방 체인점을 운영하는 ㄱ씨(32)스타크래프트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는 데 사활이 걸린 PC방 업계로서는, 게임 대회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더욱이 게임 대회를 통해 배출한 프로게이머를 장사에 활용할 수 있으므로 업계로서는 일석이조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PC방 주인들은 프로게이머를 놓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벌인다. 고수가 있는 곳에는 한 수 배우려는 게이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치밀한 두뇌영어 실력 있어야 고수

특히 중소 규모 게임 대회는 돈 놓고 돈 먹기’가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것이 업계 상술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근거이기도 하다. 지역이나 동네 PC방 차원에서 개최하는 게임 대회는 대부분 게이머들에게 5천~1만 원가량 참가비를 받는다. 결국 이렇게 모은 푼돈을 상위 입상자 몇 명에게 몰아주는 방식인 셈이다. 게임 대회가 스타크래프트 종목에 몰려 있는데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프로게이머의 진짜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임 칼럼니스트를 꿈꾸며 서울 아현동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김성훈 씨(22)는 ‘몇 달 동안 시간과 돈을 집중 투자하면 누구나 일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 게임의 특성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호된 훈련을 받으며 프로 선수로 성장하는 야구골프 종목과 달리, 단지 몇 달 배운 것만으로도 고수가 될 수 있는 게임 분야에서 프로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이 게임이 국내에 출시되기 몇 달 전 백업 CD(불법 해적 CD)로 이 게임을 미리 접했다는 이유 하나로 프로게이머 반열에 오른 사람도 상당수라고 그는 말했다. 이에 대해 신주영 씨의 매니저 임영수 씨는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게임만 잘한다고 프로게이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임 씨의 지적이다. 타고난 배짱, 치밀한 두뇌,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영어 실력과 매너(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는 네트워크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이런 자질을 갖춘 프로게이머와 동네 PC방 고수의 실력 차이는 큰 게임에서 맞붙는 순간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로게이머 2호 이기석 군(19)은 ‘게임과 게임 사이의 연관성을 재빨리 파악해 응용할 줄 아는 것이 고수의 자질이라며, 진정한 프로게이머라면 스타크래프트 이후 인기를 얻게 될 다른 종목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나타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자질 문제를 들어 프로게이머 거품론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스타크래프트 세계 랭킹 1백 위권 안에 한국인이 30% 이상 들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매너 나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이 한국 게이머들이다. ‘지고는 못 사는한국 게이머들은 욕설 퍼붓기․ 밀어주기(같은 편에게 일부러 져주는 행위)맵 핵(상대편 지도를 훔쳐보는 행위)디스커넥트(불리한 상황에서 고의로 인터넷 접속을 끊는 행위) 따위 부정행위를 자주 저지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오죽하면 한국인과 독일인 승률이 높은 것에 빗대, 오랫동안 분단국가로 지내며 전투태세가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겼을 정도이다.

 

프로게이머 받아들일 환경 열악

문제는 이처럼 승부에 집착하는 게이머들이 각종 대회를 석권하면서 진짜 프로다운 싹을 갖춘 게이머는 뒷전으로 밀리고 반짝 스타만이 명멸하는 현실이라고 강경수 씨(32․퓨전인포텍 넷피아 기술개발실장)는 지적했다. 강 씨에 따르면 리그아닌 토너먼트방식으로 진행되는 현행 게임 대회는 승부 집착증을 더욱 심화시킨다. 현재 군 복무 중인 프로게이머 1호 신주영 씨 또한 단판에 승부를 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프로게이머답게 대담하고 독창적인 게임을 펼치기보다, 안전한 게임을 선호하게 된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스타크래프트 히어로>). 흔히 프로는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을 일컫는다.

 

한국보다 앞서 프로게이머가 출현한 구미 국가에서도 게임 대회 출전만으로 먹고사는 프로게이머는 없다. 대신 프로답게 게임 전반에 정통한 이들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게임 디자이너게임 칼럼니스트 따위로 활약하며 게임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내 프로게이머 또한 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매니저 임영수 씨의 지적이지만, 문제는 열악한 제작 환경이다. 국산 게임이 존재조차 미미한 상황에서 이들 프로게이머를 품을 공간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결국 프로게이머의 미래는 게임 산업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환경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