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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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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향우, 제국주의 시대로 갓!”

 

뉴스플러스 1999. 7. 29. 

 

빨간 신호등에도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 흔히 일본인의 집단주의 의식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누군가 깃발을 들고 앞장서면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는 것이 일본인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한쪽으로 쏠리면 불만이 있어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 일본 사회다. 요즘 일본사회가 또다시 그런 분위기로 치닫고 있다. 방향은 우향우, 깃발은 든 것은 집권여당이다. 최근 자민당과 자유당의 연립정권은 굵직한 법률들을 쉴 새 없이 내놓고 있다. 이들 법률은 패전 후 50여 년 동안 일본을 특징 지웠던 기존의 틀을 크게 바꾸는 것들이다. 공통점은 강한 일본을 주장하는 보수우익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헌법조사회설치법안. 이 법안은 7월6일 일본 중의원을 통과했다. ‘헌법을 조사한다는 것은 헌법을 개정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뭘 개정할지 조사해 보자는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나 프라이버시, 환경권 등이 우선 거론된다. 그러나 이 기구가 주목받는 것은 현행 일본헌법의 제9, 소위 평화조항때문이다. 전쟁의 포기, 군비 및 교전권의 부인’.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을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위협,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육해공군과 그 외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이 조항 때문에 일본헌법은 지금도 평화헌법이라고 불린다. 헌법의 핵심조항인 셈이다. 실질적으로 군대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자위대로 부르고, 다른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수비만 하겠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 개념이 나온 것도 이 조항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조사기구 설치로 이 조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물론 헌법조사회는 법률제안권이 없는 데다 5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곧바로 개헌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중참의원 3분의 2 이상의 발의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논의하다 보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호헌론의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이다. 터부와 성역이 깨졌다는 말도 나온다. 사민당의 한 의원은 말한다. “환경권이라는 그럴듯한 말 뒤에는 제9조에 손을 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보이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힌 야마사키 다쿠 전정조회장도 이미 제9조까지 포함한 헌법개정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히노마루(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법제화하려는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한때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도 이를 법제화하는 데 망설여 왔다. 그러던 것이 히로시마의 한 고교교장이 지난 2월 졸업식 때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자살한 사건으로 사정이 급변했다. 일본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법제화를 하겠다고 나섰다. 법이 아닌 문무성의 학습지도요령으로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법으로 확실하게 정해 놓고 준수 여부는 자율에 맡기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다. 그러나 법이 제정되면 학교 현장은 사실상 준수를 강요받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중에서도 기미가요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크다. 기미가요의 기미’()는 예전부터 천황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천황의 치세를 찬양하는 노래를 국가로 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그 때문인지 기미에 대한 정부의 해석은 점차 국민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어 왔다. 84년 모리요시로 문부상(현 자민당 간사장)은 국회에서 기미상징 천황을 의미한다”라고 말했고, 89년 이시바시 가쓰야 문부상은 국민 전부를 지칭한다”라고 해석했다. 최근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자 주권을 갖고 있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바탕을 둔 천황을 가리킨다”는 새 해석을 내놓았다. 천황을 주권재민개념에 까지 연결시킨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기법안만 제정하자는 말도 나온다. 기미가요가 아닌 별도의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동일 타깃으로 한 국기 국가법안을 어떻게든 통과시키겠다는 태세다. 기미가요를 이번에 법제화하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호기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교적 거부감이 덜한 히노마루의 법제화에 끼워 넣겠다는 것이다.

 

이 법안도 722일에는 중의원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도청법안도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조직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생활침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현재 논의 중인 주민기본대장법 개정안도 마찬가지. 주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도 결국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법안은 예전 같으면 하나하나가 1년 내내 공방을 벌여도 제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란이 많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 법안이 반년도 안돼 속속 통과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테이프를 끊은 것은 4, 5월에 중참의원을 통과한 신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물꼬가 터진 것이다. 법통과의 배경에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공명당의 협조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협력자는 북한의 위협이었다.

 

지난해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올 3월의 괴선박 침투사건은 건전한 비판의 목소리를 움츠러들게 했다. 사회 분위기가 논란을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로 급변한 것이다. 북한이 일본을 돕고 있다는 역설적인 말은 그래서 나온다. 최근 일본이 추진 중인 군사위성 발사와 공중급유기 도입도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된 것이다. 북한이 위험한 행동을 할 때마다 일본의 군대는 더욱 튼튼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본을 지켜보고 있는 주변국가들은 일본이 다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견제했던 한국은 이제 무기를 잃었다. 지난해 10월 김대중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더 이상 과거문제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금 유일하게 견제를 하고 있는 것이 중국이다. 이 때문에 중국과 한국이 역할교대를 했다는 말도 나온다.

 

7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장쩌민 국가주석과 오부치 총리의 중일 정상회담에서도 중국은 신미일방위협력지침과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 개발 등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일본의 정치현실에 대해 아사히신문의 사에키 도시로 논설주간은 이렇게 비판한다. “정치가 지금 매달려야 할 과제는 산처럼 많다. 침식을 잊고 그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심의 중인 중요법안은 왠지 그런 심각한 일본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고 국민 간에 극심한 의견대립을 빚을 문제법안만 즐비하다. … 정말로 우선해야 할 과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국회를 볼 때마다 울고 싶어 진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요즘의 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