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예방 ․ 해결 프로그램 나왔다
뉴스메이커 1999. 7. 22.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이민을 떠나며 심지어 자살까지 한다. 집단 따돌림, 이른바 ‘왕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왕따’ 탈출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시도로 그치는 게 고작이지만 미국에서는 가해자를 집단 살해하는 공격적인 보복의 단계까지 와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콜로라도주 리틀턴의 컬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의 장본인 에릭 해리스는 자신이 남긴 유서에서 보복을 예고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왕따’ 현상은 점차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학교 현장에서 ‘왕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라”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학교와 사회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해법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한 민간 연구소가 ‘왕따’ 예방 및 해결 프로그램을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무형자원연구소(소장 김칠곤 박사)는 최근 새로운 인성 및 적성 검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왕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고려대학교 사범대 전성연 교수팀과 공동으로 연구 개발한 ‘상호 인식 검사법(MRTP: Mutual Recognition Test Program)’은 ‘상대적 평가’라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IQ 테스트’나 ‘진로 적성 검사’가 주관적 판단에 따라 자신을 평가했다면 이 방법은 집단 구성원끼리 상대방을 평가한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집단 따돌림 문제가 2인 이상의 집단에서 발생된다는 점을 착안,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 견제 장치에 의한 자율적 해결 방안 강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우선 교사가 칠판에 모든 학급 구성원의 이름을 적는다. 학생들은 검사지의 동료 이름란에 한 사람씩 적어 나간다. 출석부를 복사해서 나눠줄 수도 있지만 동료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으면서 그 동료에 대한 성향을 나름대로 판단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동료의 이름을 적는 것도 검사 과정에 있어 중요한 일부인 셈이다. 문항은 인성 분야의 경우 △ 지도성 △ 사회성 △ 책임성 △ 창의성 △ 봉사성 등이 있으며 △ 가해성 △ 화합성 △ 피해성을 알아보는‘집단 따돌림 성향’을 함께 묻는다. 중․고생의 경우 진로 적성 검사를 함께 실시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위의 성향에 해당하는 학생의 이름 옆에 표시하도록 지시한다. 한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으나 가급적 통계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통상 한 학급(50명 기준)의 20%인 10명 정도를 선택하도록 한다.
총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다. 검사지를 취합한 뒤 나온 결과는 그래프로 분석되며 이 같은 내용은 교사와 해당 학생에게 개별 통보한다. 학생은 자신의 성향에 대해 동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다만 서로가 어떤 ‘답안’을 기재했는가와 특정 동료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는 비밀에 부친다. 오히려 학급 내 갈등을 부추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17개 학교 2,500여 명을 대상으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검사를 실시한 결과는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자정(自淨)’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가해 학생이란 동료의 평가가 많이 나온 학생의 경우, 스스로 자신의 성향에 대해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반면 피해 학생으로 지적된 경우, 자기가 ‘왕따’ 당한 이유가 뭔가 생각하고 그렇지 않기 위해 노력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한 학생은 “남을 따돌리고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않았는데 내가 주동자인 것을 알고 반성했다”라고 털어놓았다. 한 피해 학생도 “따돌림당하는 이유를 몰랐지만 검사 결과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됐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됐다”라고 말했다. ‘왕따’ 해결을 학생 스스로가 해나가는 셈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올바른 학생 지도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 소장은 “교내․외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에 대해 집단 구성원 각자가 상호 인식한 정도를 평가해 계량화했기 때문에 객관적 검증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해 학생이고 피해 학생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왕따’ 예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 폭력예방재단의 백승환 상담팀장은 “지금까지는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몰랐기 때문에 ‘왕따’ 예방은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며 “이 같은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획기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담임교사라도 아침 조회와 종례 시간, 담당 과목 시간밖에 학생들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학급원 개개인의 성향은 물론 돌아가는 분위기를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집단 따돌림은 교사 모르게 교실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서로 쉬쉬하는 가운데 점차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교사로 하여금 전체 학급 구성원 모두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고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학생을 지도함으로써 집단 따돌림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서울 세화여고 교사 한영선 씨는 “실제로 이 같은 기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일부 학생들의 예상하지 못했던 인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크다”라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생활기록부의 비(非) 교과 영역 기록 작성에 있어서도 공정성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아울러 대학 진학 전형 자료의 객관성과 변별력을 제공하면서 교사들의 행정 업무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는 부수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밖에 인성 검사와 함께 실시되는 진로 적성 검사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두 차례 이 검사를 받았던 안양 백운고등학교 신규동 교장은 “상대방이 나를 평가해 주기 때문에 주관적 감정의 개입 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 검사를 진행할 때 감정 개입이 있을 수 있고 검사 결과가 누설되거나 폭로될 경우 동료 간의 갈등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는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김 소장은 이에 대해 “좋고 나쁜 감정이 개입될 확률은 같다”며 “큰 장애로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또 누가 누구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별도로 철저히 보관 관리하고 학생 개개인의 평가에 대해서는 학급 전원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현상이란 점을 이해시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김 소장은 덧붙였다. 아직까지 많은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지는 않지만 “공익과 교육 개혁 차원에서 원하는 학급이나 학교에 대해서는 실비로 검사를 실시해 줄 것”이라고 김 소장은 말했다. MRTP와 관련된 자료 및 문의는 인터넷 사이트 http://www.riir.co.kr나 전화 (0343) 381-4101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