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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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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여권일본 여고생을 사로잡다

 

뉴스메이커 1999. 6. 24. 

 

요즘 일본 여고생 사이에는 헤븐스 패스포트(heaven'spassport)'라는 물건이 대유행하고 있다. 시코쿠의 한 자유영업인이 시작한 이것은 학생들이 선한 일을 한 다음 딱지를 한 장씩 붙여 나가는 것이다. 이 헤븐스 패스포트는 일본 여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패스포트의 앞에 적은 다음 100장의 딱지를 붙이면 소원이 나중에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초등생들이 착한 일을 한 다음 담임교사로부터 선행딱지를 받고 이것을 모으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행태가 초등생에서 고교생에 이르기까지 널리 확산돼 있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최근호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도쿄 시내의 한 사립대 부속고교 2학년 생인 다무라 나오코 양(16)은 최근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네의 한 편의점에서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을 하나 샀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드디어 성취했어요. 이걸 완성하느라고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천국여권을 새로 하나 샀다. 그녀가 힘들여 성취했다는 것은 스웨터를 짰다든지 케이크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대신 길거리에서 담배 꽁초, 빈 깡통, 종이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든가 평상시에 어머니가 시킨 심부름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내용이다. 또 부모님의 말씀을 경청했다거나 전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아가 길을 묻는 행인에게 친절히 길을 가르쳐 줬다는 것이다. 다무라는 이런 일들을 좋은 행동이라고 해서 이번 봄부터 실천해 왔다. 벌써 천국여권을 들춰보니 딱지가 100장이나 붙어 있다. 그녀의 성취는 이를 의미한다. 겨우 이런 정도의 일을 갖고. 그러나 본인은 이에 대해 매우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녀는 좋은 일을 하면 의외로 기분이 좋아진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이제는 자연스럽다”라고 말한다. 천국여권을 발매한 곳은 오사카에 본사를 둔 ‘미치게츠(日月) 공예’라는 회사. 이 회사에 따르면 작년 10월 발매 이래 도쿄 및 시부야 등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됐다. 지난 3월 매스컴에 소개된 이후에는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현재 주문을 포함해 매상은 10만 권에 이른다는 것. 천국여권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3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층에 걸쳐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고생들 가운데에서 단연코 가장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글귀가 있는 데다 삽화들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천국여권은 소원을 이루려면 믿으시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효력이 사라집니다. 나쁜 소원은 안 됩니다라는 3가지를 소원 실현의 원칙으로 삼는다.

 

이것을 천사의 3가지 부탁이라고도 말한다. 또 소원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못 박고 있으며 여권의 말미에는 꿈을 현실로 바꾸려는 기회를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앞에 나온 다무라 양은 천국여권에 딱지 100매를 모두 붙인 다음 2권째의 천국여권을 새로 시작했다. 그녀가 새로운 천국여권에서 새롭게 소원하는 것은 날씬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는 굽이 높은 샌들을 신고 키도 키우고 싶고 멋있는 스타일도 가꾸고 싶다”라고 말한다. 다무라는 학교의 친구들과도 누가 딱지의 매수를 많이 붙이는지 경쟁하고 있다. 또 다른 여고생인 오가와 유미코 양(16)은 ‘돈을 모으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부모로부터 용돈 1만 엔을 받아봐야 자신이 좋아하는 옷 한 벌의 값도 지불하기 어렵다.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선행을 하면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좋은 일을 하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발매사인 니치게츠 공예 회사는 최근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이용자 조사를 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오후에 일어나도 되는데 오전에 일어났다” “학교에 갔다” “먹지 않는다등의 대답이 흔히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일이 선행에 포함되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놀이가 유행하는 이유에 대해 세기말의 어두운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설명도 있고 단지 여자들의 놀이문화가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이 놀이를 기획한 사람은 시코쿠 도쿠시마에 사는 프리타인 오키타 류이치라고 한다. 프리타는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사람(자유로운 free+근로자 Arbeiter)이라는 뜻이다. 오키타는 금발에 상하로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그는 좀 불량스러워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예의 바른 젊은이다.

 

그는 도쿠시마 시내의 대학 진학을 위한 사립고교에 다녔으나 디자인학교로 진로를 바꾼 괴짜다. 그러나 여기서도 흥미를 발견하지 못해 중퇴하고 그래픽 디자인 사무실에 수습공으로 들어간 뒤 20세에 귀향했다. 오키타는 이 사무실에서 상업성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는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도쿄나 오사카를 버리고 아무런 정보도 없는 도쿠시마에서 혼자 ‘제로’부터 시작하려고 생각했다. 오키타는 결심을 굳힌 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이런 생활을 2년여 하다가 어느 날 저녁 문득 패스포트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고 이것을 발전시켰다. 일본에서는 최근 여고생의 원조교제’(매춘), 10대의 살인, 쓰레기 마구 버리기 등으로 젊은이들의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한탄이 들려오고 있다.

 

젊은이들은 신문도 별로 읽지 않고 국제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키타는 고교 당시 학생회 부회장으로서 지역신문에 칼럼을 기고한 바 있다. 당시 17세였던 그도 이런 내용을 기고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이들의 도덕감 상실에 대해 성인들이 이를 비난한다고 해도 이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썼다. 젊은이들에게는 새 정보의 공급원은 음악 프로그램이나 인기 있는 록그룹에 불과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젊은이와 성인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헤븐스 패스포트를 추진하게 됐다고 한다. 오키타는 패스포트가 예상치 않게 대유행하자 당황했다.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하면서 놀랐다.

 

저서 <친절함의 병리현상>의 저자 오히라 켄은 친절이라는 것은 부모에게 상처를 주지 않거나 용돈을 드리거나 노인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출현한 것에 대해 새로운 친절함이라고 불렀다. 도쿄학예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아사노 도모히코는 새로운 친절함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천국여권이 유행하는 배경에 언급했다. 아사노는 우리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를 알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면서 천국여권은 선악의 모델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의 수요에 응하려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일본에서는 사회의 개별화가 한창 진행되던 80년대에 만인이 인정하는 것을 표준으로 보는 풍조가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거품이 붕괴되자 그런 풍조가 차라리 좋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여러 단계로 얽혀 있는 애매한 것을 좋은 것은 분명히 좋다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여고생들은 오래전부터 부모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오늘날 복잡한 사회에서 무엇이 진실로 폐가 되는지 알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쓰레기를 줍거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같이 알기 쉬운 선행으로 정형화하는 것이 필요해진 것이다. 천국여권은 일본 청소년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