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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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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노인들! 방황하는 노인들!

 

 뉴스피플 1999. 5. 20.

 

경로효친을 제일의 미덕으로 여겼던 충효의 나라한국. 그 옛날 공자가 한국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은 어떤가. 서울의 탑골공원과 남산공원에만 하더라도 버림받은 노인들로 가득하다. 특히 IMF관리체제 이후 생계가 곤란해진 탓인지 그 숫자는 부쩍 늘어나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전문가들은 노인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제는 정부차원에서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문제는 지금의 노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시민단체나 사회봉사단체 관계자들은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 각자가 ‘입장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5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3가 지하철역. 낡고 허름한 잠바에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든 할아버지들이 보기에도 힘겹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길가 곳곳에 할아버지들이 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10분 후 할아버지들이 도착한 곳은 탑골공원. 이미 이곳은 마땅한 휴식처가 없는 할아버지들이나 실직자들이 쉽게 모이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어느새 2천여 명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들이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구경하고 있는 노인들의 등뒤에 다가가보니 장기나 바둑을 훈수하고 있었다.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노인들도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기도 했다. 문방사우를 꺼내놓고 한자로 된 문구를 열심히 쓰고 있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즐거워 보여 겉보기에는 괜찮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후문 근처에 갔을 때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간간이 줄이 끊긴 곳에는 돌멩이나 흙 따위로 눌러 놓은 신문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료로 배식되는 점심을 먹기 위한 줄이다. 나이를 밝히기 싫다는 김태수 할아버지는 의정부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아침 8시 정도에 나왔다”고 했다. 아침 7시부터 와서 기다리는 노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인 12시가 되자 공원 전체가 술렁거렸다. 서로 자기 자리라고 우기고 새치기하지 말라는 다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식권이 떨어지면 밥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식권을 받지 못한 노인들은 5시간이 넘게 기다려 온 것이 허사가 된다. 노인들의 수에 비해 배당하는 무료급식 서비스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식권을 받지 못한 노인들을 위해 컵라면 한 사발씩을 줬다. 할아버지들은 그걸 받아 들고 공원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는 오후 5시부터. 서울 아현동에서 왔다는 신영식 할아버지는 저녁밥은 일하고 온 젊은이들(청장년 실업자들을 지칭)을 먼저 주기 때문에 줄을 서도 먹기 힘들 때가 많다그러나 거기에 오는 모든 젊은이들이 다 일하는 것도 아닌데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IMF관리체제 이후 식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노인들의 수는 하루 2천~3천 명 정도이고 이는 예년의 2배가량되는 숫자라고 한 자원봉사자가 귀띔했다. 탑골공원 안에 모여 있는 노인들 중 서울 신대방동에서 왔다는 김영철 할아버지는 자신들을 “밥 달라고 앉아 있는 거지라고 거침없이 얘기했다. 그는 탑골공원에 가면 밥도 주고 침도 무료로 놓아주고, 이발도 해준다니까 며느리가 동전 한 푼도 안 준다”며 “담배를 피우고 싶어 길거리에 피다 버린 꽁초를 주워 한 모금 겨우 빨고 버릴 때도 많다”라고 털어놓았다.

 

공원 안의 자동판매기 커피값은 100. 그러나 100원이 없어 행여나 커피를 뽑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잔만 뽑아 달라”라고 애원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할아버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이다. 성을 내며 며느리를 욕하다가도 손자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며느리 눈치가 보여 탑골공원을 자주 찾는다는 86살의 김영삼 할아버지(서울 신대방동)는 그래도 손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탑골공원의 할아버지들은 그나마 돌아갈 가족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얘기다. 같은 날 오후 1시 서울 세검정에 자리 잡고 있는 청운양로원. 돌아갈 가족이 없거나 혹은 경제 한파로 가족들이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어 보호를 맡겨온 73명의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눈짐작으로 보아도 6~7평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좁다란 방을 78명의 할머니들이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다.

 

베개 하나, 옷장 하나가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다. 할머니들의 하루일과는 식사와 TV 시청, 취침이 대부분이다. 2명의 사회복지사가 종이접기, 단전호흡, 영화감상, 음악감상 등 치매예방과 건강 증진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두고 있지만 참여율이 저조하다. 배워도 쓸데가 없다면서 TV를 보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 김승희(金承姬 28)씨는 할머니들이 생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다상담과정을 통해 따뜻하게 보살펴 주고 싶지만 1명이 70명의 할머니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노인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듯했다.

 

우리나라의 노인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는 보건복지부의 노인복지과. 우리나라에도 노후 소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경로연금’ ‘노인취업알선센터의 운영’ ‘노인공동작업장 설치확대’ ‘노인건강 및 재가복지사업등에 관한 법률이 선진국 못지않게 갖춰져 있다. 그러나 이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예산이 없어서 제대로 안되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의 최성재(崔聖載 53) 교수는 “우리나라 전체 노인의 55%가 도움이 필요한 빈곤 노인이라며 개인이 빈곤노인을 모두 돕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강력한 노인복지 정책 입안과 추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박재간(朴在侃 72) 소장도 “현재 노인들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일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이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