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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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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이 뜬다

 

 뉴스메이커 1999. 4. 29.

 

우리 식욕의 영원한 상징어 짜장면 바람

원색의 조잡한 영화 간판이 내걸린 읍내. 세탁소가 있고 양복점이나 한의원이 있는 그 골목 어귀쯤 그 집이 있었다. 큼지막하게 세로로 쓰여져 내걸린 북경루(北京樓)’자금성(紫禁城)’, 혹은 중화반점(中華飯店)’ 등의 간판. 그 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던 시절.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어 맛있게 비벼 먹는 것이 최고의 별미였던 그때. 중국집의 자장면은 늘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코흘리개 아이들에겐 중국집 문턱은 늘 넘어설 수 없는 성역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아니 심하면 몇 년에 한 번 정도 그 문턱을 넘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 수타식(手打式)으로 내리쳐 뽑은 쫄깃쫄깃한 면발, 그 위에 춘장으로 만든 까만 자장이 얹혀지고 녹색 완두콩이 두세 개 얹혀진 이색적인 먹거리.

 

그 자장면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 평생을 지배한다. 살면서 중국집을 보면 다른 어떤 중국음식보다 먼저 자장면이 떠오르고, 중국집에 가면 열 명 중 여덟 명은 자장면을 시킨다. 한때 웃기는 자장면이라는 유행어도 있었고, 자장면 배달부를 희화한 철가방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별명은 으레 짱께이거나 떼국놈이었다. 한 세기가 끝나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먹거리뿐 아니라 세계에서 밀려온 풍성한 먹거리들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자장면은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 세기 동안 먹거리의 대표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IMF 이후 눈에 띄게 궁핍해진 우리네 삶 속에서 자장면은 다시 그 눈부신 이름을 앞세우며 우리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특히 문화계에서는 그 위력이 대단하다. 영화에서부터 CF만화가요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단골 소재로 떠오르면서 세기말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구나 자장면에 열광하는 세대들이 자장면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신세대들이어서 더욱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자장면이 문화상품으로 부각된 것은 신세계통신 017 이동전화 CF에서부터. CF에서 개그맨 이창명은 자장면 배달부로 등장하여 울릉도 앞바다까지 자장면 배달을 갔다가 마라도로 옮겼다는 김국진의 말 한마디에 바다에 빠지는 장면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CF 속의 대사 자장면 시키신 분은 유행어로 떠올랐고, 그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자장면 체인점 프랜차이즈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영화화까지 됐던 비트의 콤비인 만화가 허영만 씨와 스토리작가 박하 씨가 손잡고 내놓은 만화 짜장면도 큰 인기다. 격주간 만화지부킹(학산문화사)에 연재 중인 이 만화는 3월 말 첫 권이 선보인 뒤 초판 3만 권이 매진되어 재판에 돌입했다. 이 만화는 도서대여점이나 만화방에서 신세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강남반점자금성등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두 경쟁업소의 주도권 쟁탈전을 기본으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주방장 치얼과 그를 후원하는 건달친구 설기, 치얼의 장인정신을 존경하는 여자친구 혜미 등이 엮어나가는 휴먼스토리다.

 

80년 초 만화가 한희작 씨의 그림과 스토리작가 임응순 씨의 글로 선보였던 만화 뱁새가 황새를 따라간 까닭은을 리메이크한 작품. 두자장면 명가의 대결구도를 무협지적인 접근으로 다루는가 하면 각종중국 음식이 등장하는 등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서민적인 음식을 소재로 신세대들의 취향에 맞게 포장을 곁들인 것이 성공 요인이다. 부킹의 편집장인 박성식 팀장은 스토리 진행이 빠르고 사회적인 잣대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신세대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 이 만화의 성공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자장면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정면에서 다뤄 모든 세대를 포용할 수 있는 만화로 포장한 것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한편 스토리 작가인 박하 씨는 만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애니메이션요리책 등 한 가지 아이템으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원 소스멀티 유스전략을 세웠다. 만화의 스토리를 시나리오로 엮은 짜장면이 영화진흥공사의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됐고, 2001년에는 만화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또 맛있는 자장면을 만드는 비법을 담은 요리책도 발간할 계획이다. 박하씨는 자장면의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전국의 유명 중국집과 수타(手打) 자장면을 만드는 주방장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자장면의 모든 것을 취재해 왔다. 한국영화도 요즘 자장면의 고소한 냄새로 가득하다.

 

424일 개봉되는 북경반점(北京飯店)(김의석 감독)은 자장면을 소재로 만든 음식 영화. 최고의 자장면을 만들기 위한 중국집 점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치열한 장인 정신을 휴먼터치로 그린 작품이다. 조미료와 캐러멜을 첨가하여 단맛을 내는 요즘의 자장면과 달리 자장면의 맛을 내는 주재료인 춘장을 직접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하는 고집스러운 한 사장(신구 분). 한 사장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스파게티집 지배인을 그만두고 점원인 양한국(김석훈 분) 등과 함께 아버지의 장인정신을 이어 중국집을 재건하는 한미래(명세빈 분) 등이 기둥줄거리를 엮어간다. 중국 요리의 달인 양명안 씨와 모종안 씨가 요리 감독으로 참여하고, 인천 차이나타운에 세트장을 마련하는 등 촬영 과정에서 풍성한 에피소드를 양산하기도 했다.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와 비유되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요리 영화라기보다는 휴머니즘 영화에 가깝다. 51일 개봉하는 컬트 코미디 신장개업(김성홍 감독) 역시 중국집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소읍, 하나밖에 없는 중국집 중화루앞에 또 다른 자장면집 아방궁이 들어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방궁의 기막힌 자장면 맛 때문에 하루아침에 파리 날리게 된중화루의 왕 사장(김승우 분)아방궁에 자장면 맛을 보러 갔다가 음식 속에서 손가락을 발견하고 기겁을 한다. 자장면 맛을 내기 위해 인육을 사용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왕 사장이 이를 추적하기 위해 나서면서 영화가 으스스하면서도 포복절도할 컬트코미디로 변한다. 부드러운 남성 이미지의 대명사인 김승우가 코믹 연기를 펼치고, 여배우 진희경이 촌스런 중국집 부인으로 변신하는 등 배우들의 연기를 주목할 만하다.

 

영화 넘버 3에서 재떨이로 출연했던 박상면이 중국집 주방장으로, 신인 이범수가 철가방으로 등장한다. 북경반점이 중국 음식을 소재로 했다면 신장개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중국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컬트 코미디라는 점에서 사뭇 다르다. 힙합그룹을 표방한 5인조 그룹 ‘G.O.D'는 자장면을 소재로 한 노래한 곡으로 데뷔와 함께 스타가 됐다. 이들의 데뷔곡 <어머님께>는 멤버 중 한 명인 박준형의 어린 시절 경험담에 살을 붙인 가사로 인기를 모은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짜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지 않았어/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온 신세대들에게는 전혀 입맛이 맞을 것 같지 않은 이 노래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IMF로 인한 궁핍한 세태와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비닐하우스의 화초처럼 커온 신세대들이었지만 IMF로 인한 부모세대들의 궁핍으로 자신들의 삶 역시 과거에 비해 어려워진 것이 현실. 여기에 자장면이라는 적절한 소재가 신세대들의 귀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또 PC통신상에서 새로운 버전들로 패러디되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비판하는 풍자와 해학 넘치는 가사로 개사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돈이 넘쳤고/남들 다 하는 결식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혼자서 뜯어먹었던 갈비/그러다 갈비가 너무 지겨워서/더 비싼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숨겨 두신 달러돈 바꿔 시켜주신/T.G.I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부유층 버전으로 명명된 개사곡은 수십 가지 버전으로 바뀌어 신세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자장면은 서민음식의 상징이자 서구음식에 대비되는 우리 음식 중의 하나인 셈이다. 사진작가 조남룡 씨도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국집들을 사진에 담아 사진집 중국인 거리를 내놓기도 했다. 이 사진집에는 최초의 중국집으로 알려진 ’공화춘(共和春)‘등의 고색창연한 건물 사진이 담겨 있다. 한 시대의 먹거리는 그 시대의 생활 풍습과 수준, 또 기후와 토양 등 다양한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 시대에 왜 다시 자장면인가. 사회학자나 문화평론가가 아니더라도 그 해답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 바닷가재 요리나 피자, 스파게티와 햄버거, 일식 우동이나 스시가 아닌 ’자장면‘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 때로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한편에는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구수함이 숨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