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경품, 마약인가? 보약인가?
시사저널 1999. 4. 29.
유통업계 사은․경품, 행사 ‘점입가경’…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중소 제조업체 사장은 최근 백화점 측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백화점 세일 기간에 제공할 사은품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점잖게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늘상 있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백화점간에 판촉 경쟁이 과열된 탓인지 이번에는 예년에 비해 정도가 심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반발할 수 없는 처지여서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나 검토해 보려고 했다. 그래서 전화를 건 곳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그러나 그는 오히려 무안만 당하고 말았다. 요즘 그 정도 경품․사은품 행사를 안 하는 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공정위마저 경품이나 사은품을 지극히 당연시하는 태도에 놀랐다는 그는, 그 후 걱정이 한 가지 더 늘었다.
“소비자들조차 경품이나 사은품을 그렇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경품이나 사은품을 끼워주지 않을 경우 누가 우리 제품을 사려고 하겠는가.” 시청자(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각 방송사의 스튜디오 벽면에는, 으레 일반인에게는 낯설지만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유명한 사람들의 명단이 붙어 있다. 각 프로그램이 내건 경품과 사은품을 타기 위해 줄기차게 전화를 걸거나 응모 엽서를 보내는 이들이다. 개중에는 온 가족이 꾸준히 참여해서 ‘아담스 패밀리’라는 별명이 붙거나, 필요하다면 이름이나 직업까지 자유자재로 바꾼다고 해서 ‘투명 인간’이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들도 있다.
아파트․외제차에 쌍꺼풀 수술까지
방송가에서는 경품과 사은품으로 딸의 혼수용품을 장만했다거나, 연간 소득을 2천7백여만 원 올렸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떠돈다(실제로 일본에서는 한 방송사가 경품과 사은품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 인기를 끌고 있다). 경품․사은품 행사가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었나를 보여주는 예이다. 백화점에서 여성지․운동 경기장․방송국에 이르기까지 경품과 사은품이 내걸리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가장 떠들썩한 곳은 백화점이다. 전국의 모든 백화점이 4월의 세일 기간에 경품․사은품 행사를 벌였다.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분당점은 벤츠나 BMW 같은 고급 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자극적인 경품이나 사은품이 등장하고 있다. 올해 초 소주 업계는 병뚜껑에 아파트와 주택 구입 자금 같은 경품내용을 표시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공정위가 위법성을 조사한다고 하는 바람에 소주업계는 이 경품 행사를 취소했다. 하지만 국민 건강을 해치는 소주라는 상품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이런 경품 행사를 말렸을까 하는 해당 업계의 불만도 제기되었다. 백화점 경품에도 외제 차 외에 대학 등록금과 5백만 원어치 물건을 살 수 있는 상품권 같은 사실상의 현금까지 등장했다. 대전의 앤비백화점은 4월 세일 기간에 백화점 주 고객층 인 여성들의 아름다워지려는 욕구에 착안해 쌍꺼풀 수술을 경품으로 내걸어,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경품 행사 철회 운동을 벌였던 대전 YMCA 김일식 부장은 “고객을 끌어들이겠다는 경품의 본래 취지를 명백히 벗어난 상혼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앤비백화점은 경품 당첨자가 원할 경우에 한해 수술을 해준다고 한 발짝 물러서기는 했지만, 경품 행사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경품․사은품 행사를 벌이는 주체가 어디건 목적은 한결같다.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성행하는 이런 행사들이 고객을 유인하는 효과가 얼마나 될까.
백화점 관계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경품․사은품 행사를 하기 때문에 고객 유인 효과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대답밖에 들을 수가 없다. 실제로는 어떨까. 백화점 업계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다 독립해 유통 분야 정보를 인터넷 공급하는 패션코리아 김기대 사장(36)은 “고객 유인 효과가 크고, 또한 점차 더 커지고 있다”라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97년 11월 핸드폰을 사은품으로 내걸었던 롯데백화점은 ‘017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바겐 세일 기간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또 지난 연말 서울 YWCA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 3명 중 2명이 백화점의 경품․사은품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2명 중에 1명이 경품․사은품 행사가 있을 때 백화점을 찾았고, 경품이나 사은품을 타기 위해 모자라는 액수를 채워 넣느라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산사람도 3명에 1명꼴이었다. 경품․사은품 행사의 고객 유인 효과는 다분히 소비자들의 불합리한 경제적 판단에서 말미암는다.
백화점에 따라, 또 기간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고액 경품이 당첨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한 백화점의 관계자도 “경품․사은품 행사 기간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것을 감안하면, 백화점 경품에 당첨될 확률은 복권 1등 당첨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라고 자인한다. 거저 얻게 되는 사은품의 경우도, 소비자로서는 추가 지출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원하는 사은품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비용 같은 것들이다. 경품․사은품 행사가 연말이나 새로운 경쟁업체가 생겨날 때 집중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두 시기 모두 백화점 경영진의 실적이 집중적으로 평가받는 때이다. 이런 때라면 백화점 경영진은 경품․사은품 행사를 자제하겠다는 기왕의 묵계도 쉽게 깨려 든다는 것이다.
경기도 성남․분당 상권이 이번 봄 경품․사은품 행사의 진원지가 된 것도, 롯데백화점이 이 지역 블루힐 백화점을 인수해 분당점을 내면서였다. 롯데백화점 분당점은 지난 4월 1일 개점하면서 벤츠․BMW 등 최고급 외제차를 경품으로 내걸어 경품 전쟁을 주도했다. 고급 경품과 사은품은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낸다. 소비자에게 고급 백화점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다. 특히 롯데백화점이 경품․사은품 고급화를 주도하는 것이 현대백화점 등 후발 주자에 의해 아성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백화점 업계는 분석한다. 부유층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수익성을 올리는 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추세대로 가면 유통업계에 불리
공개 경품 비용은 대개 백화점이 부담한다. 반면 사은품은 입점 업체들이 각출해서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경품․사은품 행사로 매출액이 늘기만 한다면 백화점 처지에서는 한번 시도할 만한 전략이다. 공정위가 올해 초부터 경품 가액 한도를 매출액 1% 이내로 대폭 완화한 것은 소비를 부추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경품 행사가 경제적으로 타당성 있는 전략이라고 판단해서다. 따라서 경품․사은품 행사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발도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 서울 YWCA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품의 부정적 영향은 과소비 조장(46%), 사행심 조장(38%), 상품 가격 상승(30%) 순이다(복수 응답 설문). 그러나 경품․사은품 행사가 어떤 시장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나를 살펴보면, 경제적으로 더 의미 있는 분석이 나올 수도 있다. 먼저 백화점과 여성지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몇몇 업체가 한정된 시장을 나누어 가지는 이른바 과점(寡占) 시장이다. 어느 정도 제한된 스포츠팬과 시청자를 분점해야 하는 프로 스포츠나 방송 업계도 비슷한 시장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시장 구조에서는 경품과 사은품 같은 유인 요인으로 소비자를 끌어모으기가 아주 쉽다. 그러나 무한정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장이 제한된 탓에 손님을 빼앗긴 경쟁 업체가 더 나은 경품이나 사은품을 내걸어 소비자를 되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과점 이론에 따르면,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업체들이 모두 같이 망하기 직전까지 이런 고객 유인 활동을 벌이다가 균형점을 찾게 된다. 현실에서의 균형은 흔히 담합으로 나타난다. 과다한 경품․사은품 행사로 경영에 부담이 생긴 백화점이나 여성지 업계가 자율적으로 이런 행사를 자제하기로 결의하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매년 이런 담합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당장의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한 업체가 나타나 이런 균형을 깨기 마련이다. 만일 현재의 경품․사은품 붐이 단순히 이런 주기적인 과정에 불과하다면, 도덕적인 이유 말고 다른 이유로 해당 업계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악순환 과정에서 소비자의 행동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유통 업계는 잊고 있는 것 같다. 경품․사은품 행사가 거듭될수록, 경품․사은품이 자극적이 될수록, 소비자들은 이런 행사가 없을 때는 쇼핑을 피하게 된다. 백화점의 횡포에 대한 제보를 처리하는 해결사 노릇도 하고 있는 김기대 사장은 이런 점에서 경품․사은품 행사를 ‘소금’과 ‘마약’에 비유한다. “경품․사은품 행사는 간간이 잘만 활용하면 소금이 될 수 있다. 음식에 맛을 더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마약이 될 수도 있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쾌감을 느끼지만, 횟수가 늘어나고 일상화하면 할수록 그 강도를 더해야 하고 멈출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