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돼지?
뉴스플러스 1999. 4. 22.
‘모든 것이 돼지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요즘 일본뇌염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것이 돼지파동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페라크주에서 시작된 일본뇌염은 4월 초까지 무려 88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감염지역도 페라크에서 피낭으로 퍼져갔고 최근엔 수도 콸라룸푸르가 위치한 슬랑오주에서까지 환자가 발생했다. 말레이 반도 전역에 일본뇌염이 만연한 것이다. 양돈농가들은 돼지를 버리는가 하면 돼지고기를 파는 음식점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미 군대를 동원해 돼지를 죽이고 있다. 인접국인 싱가포르에서도 일본뇌염 환자가 발생하자 싱가포르 정부가 돼지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왜 일본뇌염이 발생했는데, 돼지파동이 일어난 것일까? 돼지가 일본뇌염 세균을 증폭시키는 중간숙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영국의 광우병, 홍콩의 조류독감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인간에게 가져온 재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일본뇌염은 다민족사회인 이 나라에서 민족 간의 반목과 갈등을 대변하면서 민족갈등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광우병이나 조류독감과 달리 심각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말레이시아의 다수민족인 말레이족은 모두 회교도여서 ‘부정한 동물’인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심지어 소시지나 햄도 먹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중국계(華人)와 인도계다. 특히 화인은 돼지고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다. 따라서 양돈농가는 대부분 화인들의 것이다. 돼지고기를 요리해 파는 음식점들도 화인들이 경영한다. 이런 말레이시아에서 돼지는 때로 중국계 사람들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는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과 관련된다. 말레이시아에서 화인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은 “시끄럽고 탐욕스럽고 더럽다”는 것이다. 또, 근면하고 검약하는 생활습관을 지닌 화인들과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사랑과 놀이를 중시하는 동남아인들의 문화는 상당히 대립적이다.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돈 모으기에 치중하는 화인들의 모습은 말레이인들에게 ‘탐욕’의 화신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말레이계는 이민자인 화인들을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시각으로 본다. 경제력을 가진 화인들은 말레이 건국과정에서 말레이계와 함께 말레이시아인으로 통합됐으면서도 아직 토착인들의 몫을 빼앗아간 사람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파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화인들이다.
우선 돼지에 대한 무차별 도살로 양돈농가들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다. 정부에서 돼지 한 마리 도살에 대해 50 링기트(한화 1만 7500원)를 지불하지만 이것으로는 손해를 메울 수 없다. 돼지고기 가공업체들도 대부분 화인들이 경영한다. 그러나 이제는 돼지고기 가공식품도 잘 팔리지 않는다. 대중적이고 현지화된 돼지고깃국인 바쿠테를 파는 음식점도 파리를 날리고 있다. 이렇게 일본뇌염 창궐의 원인을 화인들에게 돌리는 말레이계들의 시각과 양돈 전면금지 논의는 화인들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화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는 화인계 여당 MCA에 불신감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뇌염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문제화되고 국회에서 대정부 공세가 계속되면서 다가오는 선거에서 돌발변수가 될지 모른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말레이계 여당인 UMNO가 아직 내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마당에 지난 9월 부총리직에서 해임된 안와르의 부인 아지자는 남편을 대신해 4월 초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불안정한 정정 속의 말레이시아 선거는 3월에 끝난 사바주 선거를 필두로 내년 6월까지 계속된다. 여기서 돼지고기 파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경우 여야 구도의 큰 변화가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