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상품 ‘싸도 비지떡 아니다’
중앙일보 1999. 2. 19.
서울 상계동에 사는 주부 강은영(31)씨는 미도파백화점에 세탁기를 사러 갔다가 난감한 일을 겪었다. 언뜻 보기에 똑같은 10㎏짜리가 한 개는 71만 7천 원, 다른 것은 58만 원으로 무려 13만 7천 원이나 차이가 나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당혹스러웠던 것. 더구나 이들 제품은 모두 대우전자의 제품으로 기능상 별다른 차이점도 없었다. 최근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침구. 의류. 식기류 등을 중심으로 정상품과 똑같은 기능. 디자인의 기획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비자들은 아무래도 값싼 기획상품에 눈길이 먼저 가지만 ‘혹시 하자는 없을까’ 우려해 선뜻 고르기도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쓸 용도에 맞춰 기획상품을 잘 고르면 경비를 그만큼 절약할 수 있다.
◇ 어떤 차이가 있나 = 대우전자 세탁기의 경우 정상품과 기획상품은 단지 표면에 특수 코팅처리를 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뿐이다. 특수 코팅처리를 하면 외관이 더 윤기가 나고 고급스러운 색으로 보이는 데다 긁힘 현상이 적어지는 효과가 있다. 디자인이나 기능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백화점. 용산전자상가 등에서 팔고 있는 LG전자의 TV(29인치)도 이와 마찬가지. 정상품(CN-29K1)은 85만 2천 원인 반면 기획상품 (CN-29H3)은 54만 7천 원에 불과하다. 기획상품은 좌우 회전할 수 있는 기능과 입체음향을 빼 정상품보다 30만 5천 원이나 값싼 것. TV에서 돈을 더 주고라도 전문가 수준의 입체음향을 즐기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값싼 기획상품을 고르는 게 알뜰 구매방법이라는 게 관련 바이어들의 설명이다. VCR도 부수적인 기능을 뺀 기획상품이 정상품보다 15% 정도 싸다.
대우의 6 헤드 VCR 정상품(DV-K82Z)은 주요 백화점에서 46만 4천 원인 반면기획상품(DV-K706)은 이보다 8만 9천 원이 더 싼 37만 5천 원에 살 수 있다. 또 LG전자도 4헤드짜리 기획상품(LV-40)이 29만 9천 원으로 정상품(LV- 60, 36만 2천 원)보다 6만 3천 원이 싸다. 이들 기획상품들은 재생. 녹화 등 단순기능만 있는 반면 정상품은 자기 진단. 케이블 예약녹화. 고화질. 시간자동설정. 순간반복 등 다양한 기능을 더 가지고 있어 그만큼 값이 더 비싼 것. 따라서 VCR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용적인 단순기능만 갖춘 기획상품을 구입해도 큰 불편이 없다.
롯데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라라아비스 침구류는 아나이스세트 정상품이 53만 원. 그러나 기획상품은 원단 재질만을 바꿔 스펜서세트라는 이름으로 19만 원에 팔고 있다. 행남 자기의 본차이나(4인조) 정상품은 15만 원선이지만 기획상품인 803 디너세트는 거의 절반 값인 7만 6천 원에 팔고 있다. 그러나 기획품은 디자인이 다양하지 못하고 세트로만 구입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른다. 이밖에 여성 캐주얼인 신드롬도 올봄 신상품 정상재킷을 24만 원, 기획품을 12만 원에 선뵈고 있다. 갤러리아 등 주요 백화점에서 신드롬 정상품은 2~3벌씩 소량생산해 팔고 있지만 기획품은 20~30벌씩 대량생산해 단가(單價)를 낮추는 것이다. 정상품과 기획상품은 원단. 디자인에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결국 희소성이 값 차이를 결정짓고 있다는 게 해당 바이어들의 설명.
◇ 이런 상품은 왜 만드나 = 기획상품은 재고와는 달리 제조업체에서 정품보다 보통 30~40% 싸게 내놓는 신상품을 말한다. 제조업체가 주력 상품을 선뵐 때나 명절. 세일 때 소비자의 구매를 촉진시킬 목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미끼상품이다. 따라서 기획상품은 가전. 의류. 화장품. 가구. 침구류 등 대중적인 품목을 내세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게 마련이다. 이들 상품을 구입하려면 백화점이나 대리점 등 각 매장에 들러 점원들이 이를 추천하지 않을 경우 기획상품은 없느냐고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그러나 미도파의 경우 정상품은 파란색 가격표를, 기획품은 빨간색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또 기획상품은 원가를 바탕으로 값을 정하는 게 아니라 생산 이전 단계부터 소비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큼 싼 값을 정해놓고 기능을 맞춰 만든다. 따라서 이들 제품은 값에 상관없이 고품질의 상품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적당치 않다. 그랜드백화점 판촉본부 송대승 차장은 “제조업체가 원가는 물론 마진을 적게 책정해 재질. 품질면에서 다소 떨어질 수 있으나 정상품처럼 교환. 애프터서비스가 가능해 알뜰 소비에는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