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에 청소당번까지‥ ‘등골 휘는’ 엄마들
굿모닝서울 2005. 04. 12.
“애가 학교 다니는지 내가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서울교육청이 지난달‘학부모의 급식 당번을 자율화하라’는 지침을 일선 학교에 내려보냈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암묵적인 강요에 의해 학부모들이 여전히 반강제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급식 당번을 자율화했더라도 청소 당번과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해야 하는 학부모의 부담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나 편부 또는 조부모가 초등학생을 키우는 가정, 장애인 부부의 아이들은 학교에 기여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교사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동급생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례가 생겨나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 ‘말뿐인 자율화, 암묵적 강요’ = 올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서울 불광동의 주부 박모(30)씨는 최근 학부모 총회를 다녀온 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육청의 지시로 의무급식 당번제가 폐지됐지만 누군가는 급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지난달 말 이 문제로 학부모 총회를 열어 급식당번 배정표를 나눠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학부모 총회에서 교감이 “강제적으로 오시라는 건 아니고 시간이 되시는 분들께서 고맙게도 오셔서 봉사하고 있다. 아주 고마운 분들이다”라는 말을 들은 박 씨의 고민은 더 커졌다. 박씨는 “교감과 별도로 교장도 ‘학부모가 급식 당번 대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학부모가 대안을 마련하라니 말이 되나. 급식 당번을 나가지 않으면 아이가 ‘찍힐까’하는 걱정에 무언의 압박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둘째 아이가 두 돌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박 씨는 큰 아이의 학교일 때문에 나이도 채 차지 않은 둘째를 불안하지만 어린이집에 맡긴다고 했다. 박 씨는 “급식 당번이 한 달에 두 번, 녹색 어머니회, 학교 도서관 봉사도 있고 어머니 회의도 종종 있는 데다 수영장 안전사고 예방 도우미도 분기에 한번 꼴로 맡는다”며 가중한 ‘학교일 떠안기’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 씨의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선 교육청에서 강제 급식당번을 금지하자 2학년 생에게 자율배식을 연습시켜 봤는데 아이들이 밥을 푸기엔 밥주걱이 너무 커 결국자율급식을 포기했다.
◆ 급식당번 ‘알바’까지 = 딸이 부천의 한 초등학교 2학년인 회사원 강모(33)씨는 얼마 전 급식 당번을 직접 감당할 수 없어 청소 당번 아르바이트를 전문으로 하는 한 여성을 일당 3만 원에 고용해 학교에 보냈다. 강 씨는 “회사일 때문에 급식 당번을 못 나갔더니 담임으로부터 ‘00(딸이름) 어머니만 안 나오셨다’라고 전화가 왔다”며 “안 나가면 딸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봐 어쩔 수 없이 학교 인근 문구점 아주머니에게 돈을 주고 급식일을 부탁했다”라고 말했다. 강 씨는 “요즘 맞벌이 가정이 허다한데 도대체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급식부터 덜컥 시작한 교육당국과 학교는 생각이 있는 건가”라고 짜증을 냈다. 아이를 볼모로 학부모의 주머니를 교육당국이 교묘히 털고 있다는 게 강 씨의 주장이다. 급식 당번 ‘알바’를 하는 부천의 한 할머니(70)는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시 30분까지며 1만 3천 원을 주면 된다”며 “녹색 어머니회와 어머니회 참석이 아니면 다른 당번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D초등학교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 이러한 ‘대타’가 성행하자 아예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한 달에 6천 원씩 걷어 급식 담당자를 고용했다. 강남구의 G직업소개소 관계자는 “일당은 3만 원이고 월급제로도 가능하다. 고용되는 사람은 대부분 식당 경험이 있는 40대 아주머니다. 바쁜 학부형이 많아 이런 아르바이트 알선이 잘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초등학교는 가정통신문에 아예 급식ᆞ청소당번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적어 보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의 아버지 최모(34)씨는 “급식당번은 순수한 봉사이고 아이들이 학부모의 봉사를 보고 배우는 교육도구로 잘 쓸 수 있는데 오히려 학교에선 이 좋은 기회를 무의미하게 변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 씨는 “‘왜 너희 어머니는 안 오느냐’고 교사가 아이에게 면박을 준다는데 자율적이고 봉사정신이 깃들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 결손가정 위화감 조성 우려 = 이 같은 급식ᆞ청소 당번은 대부분 아이의 어머니가 담당하다 보니 편부 가정이나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위화감과 소외감에 ‘풀이 죽어’ 지내고 있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교 1학년 학부형 전모(31)씨는 “아이의 반 친구 중에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아이가 있는데 할머니가 연로해 급식당번ᆞ녹색 어머니회를 못 나오니까 담임교사에게 ‘찍혀’ 학업도 부진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학부형이 장애인인 경우엔 상황은 더 심각하다. 서울의 S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자녀를 둔 이모(32ᆞ여)씨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이 씨는 “급식당번을 안 나갈 수 없어 친정어머니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학부모에 떠넘기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당번이 돌아올 때마다 아이가 보채는 바람에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고 말했다. 이 씨는 “학교가 왜 이런 마음고생과 자괴감을 주는지 모르겠다”며 “아이가 느낄 소외감이 가장 마음이 걸린다”고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