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억 보다 값진 610만 원 성금
AM7 2005. 03. 16.
“너흰 몸 튼튼하니 포기 말길…” 장애인선수들 어려운 학생 도와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2004 아테네장애인올림픽 여자사격 금메달리스트 허명숙(49)씨. 그녀는 15일 다른 장애인 운동선수들과 함께 서울 알로이시오 학교를 찾았다. 중고교 크로스컨트리팀 학생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알로이시오 학교는 미혼모나 생활형편 등 이유로 부모가 친권을 포기한 아이들이 모인 곳.
허 씨는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걷지 못했다. 5살 때는 부모가 뿔뿔이 흩어져 이후 친척집과 고아원을 오갔다. 28살 때 처음 휠체어를 타고 세상에 나왔다. 전자제품도 조립하고, 구슬도 꿰면서 지독한 가난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이겨냈다. 그녀는 “그래도 너희들은 몸이라도 튼튼하니까 딴마음 먹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다.
이들이 기탁한 성금은 610만 원. 크지 않아 보이지만 장애인 선수들에게는 ‘피 같은 돈’이다. 허 씨가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살아왔다는 것은 알려진 얘기. 그녀는 자신의 두 달치 생활비에 맞먹는 40만 원을 내놨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올림픽 휠체어레이싱 2관왕 홍석만(30)씨는 “결혼을 돈으로 하나요”라며 자황컵 포상금 전액(200만 원)을 쾌척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역도 금메달리스트 박종철(38)씨는 “늘 받는 모습만 보여준 장애인들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만남의 처음은 서먹서먹했다. ‘장애인 운동선수’를 쉽게 접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베푸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곧 달라졌다. 허벅지 만한 박 씨의 팔뚝이 놀라운 듯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홍 씨가 가파른 비탈길을 휠체어를 탄 채 쏜살 같이 내려갈 때는 “와~”하는 탄성이 나왔다. 아테네올림픽 사격 은메달리스트 심재용(41)씨는 “가장 힘들 때 우리를 생각해달라”고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당부했다. ‘사회가 버린’ 아이들에게 손을 내민 장애인들. 그들이 이날 전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용기와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