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파산’
중앙일보 2004. 09. 06
사망한 아버지 빚 2억여 원 ‘상속 포기’ 몰라 떠안게 돼
숨진 아버지가 진 억대의 빚을 떠안았던 여덟 살짜리(1996년 9월생) 남자 어린이가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파산 9 단독 김진석 판사는 2억 4000만 원의 빚을 진 A군에게 법정 대리인인 어머니(39)가 낸 파산 신청을 받아들여 파산 선고를 내렸다고 5일 밝혔다.
A군이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된 것은 98년 7월. 지방에서 김치공장을 하던 아버지가 97년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에 몰려 부도를 낸 뒤 이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 서다.
남편이 수억 원의 빚을 남긴지도 모른 채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장례를 치른 A군의 어머니는 이후 서울로 이사해 식당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던 중 A군 어머니는 지난 4월 법원으로부터 “농협 등 5곳의 금융기관에 진 2억 4000만 원의 채무를 상속인인 A군이 갚아야 한다” 는 날벼락같은 통지서를 받았다. A군의 아버지(당시 52세)가 숨졌을 때 “민법상(1005조) 법정 상속인은 빚도 갚아야 한다” 는 사실을 몰라 ‘상속 포기’ 등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지서는 법적 채무상속인이 된 A군에 대해 채권자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승소한 뒤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날아든 것이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해 파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파산을 신청했다.
김 판사는 파산을 선고하면서 “법률적 이해가 부족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 고 밝혔다.
A군은 현재 면책 심리를 받고 있다.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으면 아버지의 빚은 모두 취소되고 파산자로서의 신분상 제약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