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형 인간’ 거부… ‘자아형 인간족’ 달려온다
조선일보 2004. 01. 01
자기실현 동호회 봇물
4년 차 은행원 박정일(34)씨는 7시 퇴근시간만 지나면 투지에 불타는 링 위의 복서가 된다. 벌써 6개월째다.
“어느 날 하루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덜렁 침대에 누워 생각했죠.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는가?’ 나를 위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날 이후 바로 권투도장으로 직행했죠. 양손에 글러브를 끼고 벌처럼 나비처럼 링 위를 날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열심히 해서 국제아마추어 복싱대회에도 출전할 생각입니다.”
그는 “예전 같으면 ‘피곤한데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힘을 빼고 난리야?’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직장에서 벗어나 내 욕구를 분출하는 것이 직장생활에도 도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 말했다. “맡은 일은 충실히 해내되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자는 게 새 신념이 됐습니다.”
집, 회사, 다시 집…. 똑같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날마다 반복되는 직장 업무에만 목숨 거는 ‘회사형’ 인간을 거부하고, ‘내 삶(My life)’ 을 외치며 다양한 자기실현에 적극 나서는 신세대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조직 속의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재능과 다양성을 이끌어내는 활동으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자아형’ 인간족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낮에는 똑같은 직장인이지만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기타리스트’ ‘복서’ ‘소설가’ ‘디자이너’로 변신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이중 직업을 갖는 투잡스족과 달리 이들은 ‘자아실현’을 화두로 인생의 느낌을 즐긴다.
지난달 29일 오후 8시 서울 혜화동의 한 상가건물 지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귀청을 찢는 록음악이 터져 나왔다. 방음장치가 천장까지 가득히 덧대진 7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이창훈(31)씨는 다른 30대 멤버들에 섞여 전기기타를 치고 있었다. 귀 밑까지 정리한 단정한 머리에 넥타이만 풀어헤친 정장 차림. 그는 7년 차 직장인이다. 일상의 삶에 회의가 생기던 어느 날 인터넷 카페에서 음악을 좋아한다는 직장인들을 만나 록밴드를 결성하게 됐다. 그는 “생계를 해결해 주는 직장의 고마움을 잊은 적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직장에만 구속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 말했다.
대부분 ‘자아형’ 직장인들은 자기 돈을 써가며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때로는 그것이 의외의 부수입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중소 해운회사에 다니는 김영철(33) 과장은 2002년 9월부터 인터넷의 한 소설 전문 사이트에 ‘천군(天軍)’이라는 소설을 연재한 뒤 뜨거운 반응 덕에 책까지 냈다. 김 씨는 “매일 밤 9시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나와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소설내용을 구상하고 집에 도착해 1시간씩 타이핑을 하는데 피곤한 줄 모르겠다” 며 “하루 최고 1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할 때 느끼는 그 짜릿한 만족감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자아형’ 직장인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인터넷 동호회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카페 관리자 장재영 씨에 따르면 ‘직장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동호회만 해도 16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직장인 록밴드’부터 ‘직장인 만화 동호회’에 이르기까지 직장인들 관련 동호회가 작년보다 70% 이상 늘어났고, 요즘도 하루에 수십 개씩 새로 생기고 있는 추세다.
이들을 타깃으로 삼아 서울 강남이나 종로의 어학원, 헬스클럽들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신종 업종인 ‘요가 강습소’ ‘마술학원’ ‘칵테일 전문학원’ ‘꽃꽂이학원’ 등도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예전엔 주부 중심이었던 백화점 문화센터도 요즘은 직장인들이 장악해 버렸다. 현대백화점 문화사업팀의 한 관계자는 “‘솔로들의 식탁’이라는 요리 강좌를 포함해 직장인들에게 인기 있는 수업을 저녁반, 주말반에 신설했다” 고 말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요즘의 20․30대 직장인들은 어릴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교류하고 만남을 갖는 문화에 익숙한 세대” 라며 “직장에만 목을 매는 획일적 삶에서 뛰쳐나와 남과 다른 취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이 새로운 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 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