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cs 2024. 12. 24.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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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의 아버지는 아들이 평범한 농군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포드는 16세의 나이에 집을 떠나 디트로이트로 가서 기계공이 되었다.

포드는 뒤에 에디슨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에디슨 회사의 기사장이 된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동차 설계에 매달렸다.

그의 관심은 가솔린으로 움직이는 차였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값싼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29세가 되던 1892년 그는 첫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공장을 운영할 돈이 없었다.

마침 그는 디트로이트의 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자동차 경기에 출품을 했다.

여기서 우승을 하자, 많은 자본가들이 나타났다.

 

포드는 10년 후 1주일에 2만 대의 차를 만들 수 있는 공장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어느 날 포드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공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일을 하는 직공들이 그들을 보고 인사는 하지만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면서 약간은 아니꼽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그 직공들은 초겨울의 날씨인데도

얇은 내의 바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포드는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획기적인 경영 개선안을 내놓았다.

 

8시간 노동제,

다른 공장에 비하여 23배가 높은 하루 최저 5달러의 기본 임금제,

학교와 병원을 지어서 직원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포드는 더 나아가서 나라를 위하여 복지 시설을 도왔으며 사회사업까지 행하게 되었다.

포드는 말했다. “자기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나와 남이 속해 있는

사회와 나라를 생각하지 않으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이 싫다고 하여서 달러($)를 모아서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

우리나라 물건이 싫다고 해서 외제를 선호하는 사람들,

우리나라는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온통 나쁘다고만 불평하는 사람들,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보며 어느 누가 그들을 좋아할 수 있을까?

입으로는 내수경제 신토불이를 외치지만 

집안에 모든 것들은 외제로 가득 차있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불쌍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