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 문화 공습 ‘예고편’은 끝났다
시사저널 1999. 12. 2.
대동아 공영권에 대한 경보음이 부쩍 요란해졌다. 물증은 이런 것이다. 헬로 키티․포켓몬․아니메, 혹은 X-JAPAN이나 아무로 나미에. 구체적인 계기는 아무래도 ‘포켓몬’ 열풍이다. 영화계도 심상치 않다. 지난주 개봉된 <러브 레터>는 그동안‘거장의 회고전’ 수준으로 소개되던 일본 영화와는 호객(呼客) 수위가 달라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토론토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아 가까스로 2차 개방 대상에 포함된 <러브 레터>는, 개봉 첫 주말에 관객 8만 명(서울)을 끌어들였다. 지금까지 정식 개봉 된 일본 영화는 총 4편.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와 <나라야마 부시코>. 평은 좋았으나 생각만큼 관객몰이가 되지 않은 탓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터였다. <러브 레터>는 일본에서 ‘오 겡키데스카’(잘 지내나요? - 여주인공이 즐겨 쓰는 인사말)가 유행어가 될 만큼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우리나라 관객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다. ‘제목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데, 왜 영화는 몰래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풋사랑의 편지처럼 마냥 설레고, 절절한 거냐.’(천리안, 적바림) 첫 주 객석 점유율이 75%에 이른 만큼 이런 입소문이 퍼지면 개봉관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미국 언론들, 일본 문화 저력에 경탄
일본 문화 경보 경계가 울린 곳은 아시아뿐만이 아니다. 90년대 초 일본 애니메이션이 호응을 얻는 것을 보고 ‘제3의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미국은, 최근 ‘10여 년 동안 아니메(애니메이션)가 미국을 식민화하고 있다’고 엄살을 부렸다(<타임> 11월 19일). 난데없이 포켓몬 열풍이 불어닥친 데다가 그들이 ‘아니메의 신’으로 떠받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가 최근 상륙했기 때문이다. 잔뜩 겁먹은 채 조금씩 빗장을 열어 가고 있는 우리에게, 태평양 저편의 엄살이 반가운 원군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속사정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의 엄살은, 실은 감탄사다.
최근 <타임>은 ‘놀라운 아니메’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꾸몄다. 현재 <원령공주>가 미국 미라맥스 사의 배급망을 타고 있는 데 발을 맞춘 것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관객몰이가 일본 문화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정작 그들의 경탄을 자아낸 것은 <원령공주>와 그전에 만들어진 아니메 걸작들이다. 60년대 <철완 아톰>에서부터 80년대 <아키라>, 90년대 <퍼펙트 블루>로 이어지는 묵직한 아니메의 흡인력에 경의를 바치는 것이다. 지난해 <매트릭스>를 만든 미국의 워쇼스키 형제가, 자신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 <공각기동대>도 그 목록에 들어 있다.
그들이 품고 있는 경의는 미야자키를 ‘아니메의 신’이라고 부르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비슷한 예로 ‘가위질의 귀재’라는 평판을 듣는 미라맥스의 배급 담당자는, 일반 애니메이션보다 60분이나 긴데도 <원령공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작품을 간결하게 자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해하기도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구로사와나 세르지오 레오네와 마찬가지다. 이걸 자르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그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아니메는, 일단 디즈니를 넘어서는 것으로 후한 점수를 받는다.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여기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토록 장중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데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뉴스위크>도 ‘동물이 개그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잘 생긴 왕자와 공주가 만나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선과 악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특히 자연은 착하고 인간은 나쁘다는 식의 순진한 생태론도 아니다’라는 찬사를 보탰다. 그들의 태도는 우리나라 언론이, 일본 문화를 논할 때 양념처럼 경계론을 까는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양국의 특수 관계에서 비롯한 대중의 정서’를 알리바이로 삼았다가, 끝내 보호론 혹은 단계적 개방론으로 귀결되는 경계론은 그들의 문화적 힘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 통신망, 일본 문화 리뷰 ‘후끈’
대중 매체가 어떤 식으로든 경계론을 둘러치는 것에 비해, 통신 공간은 솔직한 논의를 지켜볼 수 있는 통로다. 네티즌은,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을 철없는 이들의 호기심이나 그들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의 관성적인 선택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경계한다. ‘신세대는 국적에 개의치 않고 즐긴다. 막아 놓으니 더 열광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은 일면 옳은 구석이 있지만, 조건을 일러줄 뿐 정작 왜 열광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이텔 문화비평동호회에서 ‘만화․만화영화 소모임’을 이끌고 있는 강 상익 씨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일본의 문화적 파급력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메를 좋아한다는 그는 작품 자체의 힘에 주목한다. 그가 처음 아니메를 접한 것은 군 제대 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였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직장인인 그는 이후 틈 나는 대로 글을 올린다. 그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 작품에 대해 알리고 논하는 것이 좋아서일 뿐이다. 통신의 논의는 대부분 강 씨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 의해 꾸려진다. 특히 만화 사이트는 대부분 일본 작품에 대한 리뷰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이들의 정서는 ‘일본에서 만화는 <톰과 제리>가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인 모양이다’라는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구미인들로 하여금 아니메와 망가(漫畵)를 주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아키라>(88년․오토모 가쓰히로 작), 4년 전에 발표되었는데도 최근까지 논평이 끊이지 않는 <신세기 에반게리온>(95년․가이낙스 제작) 등은 아직까지 논쟁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그들의 열광은, 점유율 따위 통계 수치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신 공간을 한 번만 순례해 보아도 울타리 치기식 경계론이 일본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얼마나 무력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