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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지배한다

 

뉴스메이커 1999. 11. 18.

 

침묵은 금이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이 시대에 침묵은 죄악이다. 적어도 선비 정신을 강조하는 우리네 정서에서 말이 많으면 가볍고 경솔한 인간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침묵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보다는 글을 앞세운 선비들의 시대가 간 것인가. 한때 글발로 먹고살던 사람들은 이제 먹고살기 힘들어진 세상이 되었다. 대신 말발을 앞세운 사람들이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연예 기획사에서는 가수를 뽑을 때도 입담을 먼저 본다. 노래도 노래지만 입담이 좋아야 대박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개그학과가 생긴 것도 이 같은 사회 현상을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이처럼 말발을 앞세운 사람들이 TV의 인기 스타로 군림하고, 각종 강단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다.

 

엄청난 철학적 바탕을 가진 입담이 아니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유머와 입담으로 세상 사람들을 휘어잡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뿐만 아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들의 동네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려한 문장과 철학적 배경을 가진 글보다는 공격적인 구어체를 구사하는 말발센 사람들의 주가가 마구 뛴다. 대학 강의실은 어떤가. 대체로 수강생들이 많이 모여드는 강좌는 말발이 좋은 재미있는 교수의 강의다. 각종 기업체와 구청 사회교육센터를 누비는 강사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입담으로 인기를 얻은 스타강사들이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 TV를 들여다보자.

 

요즘 연예인들의 인기지수는 말발이 좌지우지한다. 범람하는 토크쇼의 단골 출연자들은 대부분 말발 좋은 연예인들이다. 작곡가 주 영훈은 타고난 입담으로 MC로 전업하게 된 케이스. 댄스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방송가에서 탐내는 MC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얼굴이 잘 생겨서라거나 작곡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우연히 출연했던 KBS 2TV 서세원 쇼에서 타고난 입담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때 그의 별명은 틀면 나온다였다. 그 뒤로도 각종 쇼 프로그램의 리포터나 객원 MC로 바빴던 그는 최근 KBS 2TV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뮤직뱅크 가요톱10의 메인 MC 자리를 차고앉았다.

 

그룹 컨추리꼬꼬의 탁 재훈과 신 정환 역시 노래 솜씨보다는 타고난 입담 때문에 바쁜 가수다. 사실 개그적인 소재를 동원한 그들의 노래는 음악적인 평가로서는 별로 눈에 띌 만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앨범이 가요 순위의 상위 차트를 석권하고, 콘서트가 매진 사례를 이루는 것은 그들의 입담 덕분이다. 인기개그맨 남 희석의 로드매니저 출신 김 종석의 경우는 타고난 입심으로 연예인보다 더 바쁜 매니저가 됐다. SBSKBS를 오가면서 오락프로를 누비던 그는 요즘 SBS TV 투나잇 쇼김 종석 대학 간다코너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리포터 중 가장 잘 나가는 리포터는 개그맨 이 창명과 전 창걸. 이들 두 사람은 KBS 2 TV의의 〈TV는 사랑을 싣고MBC TV출발 비디오여행에서 타고난 입담을 인정받아 최고의 리포터로 군림하고 있다.

 

이들이 개그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프로그램에서 장수하고 있는 이유는 타고난 애드립 때문이라는 게 방송가 주변의 평가다. 개그맨 심 현섭도 뒤늦게 뜨고 있다. KBS 2 TV의 〈개그콘서트에 출연 중인 그는 타고난 애드립 솜씨와 성대모사 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닥치이라. 밤바야아아등 독특한 억양을 가진 유행어까지 만들어 낸 그는 탁월한 재치를 필요로 하는 스탠딩 개그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면서 개그계의 새로운 말발을 과시하고 있다. 개그맨 유 재석 역시 타고난 입심으로 개그맨 중의 개그맨으로 군림하고 있다.

 

KBS 2TV 서세원 쇼토크박스코너에서 최고의 말발에게 주는 왕중왕을 차지한 그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애드립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다양한 소재와 사례를 위해 PC통신을 누빈다는 그는 요즘 각종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 섭외에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개그맨이다. 못생긴 MC 박 경림 역시 타고난 말발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재미있는 얼굴도, 그렇다고 정통 개그맨 출신도 아닌 그녀는 토크박스코너에서 왕중왕을 차지하면서 이 영자 이후 최고의 입으로 통하고 있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연극 공연장에서도 말발이 최고의 상품으로 통하게 된 것은 오래전이다.

 

소위 컬트개그를 들고 나온 컬트삼총사의 스탠딩 콘서트 공연이 매공연 때마다 만원을 이루자 그 이후 소위 스탠딩 콘서트는 대학로의 벗기는 연극을 밀어내고 단골 메뉴로 자리 잡았다.퍼유 콘서트’ ‘박 경림의 개그콘서트등이 크게 히트했고, 요즘엔 이들 콘서트를 모방한 스탠딩 개그콘서트가 뒷골목 공연장을 석권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개그맨을 중심으로 한 토크쇼나 코미디 프로그램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건강박사인 황 수관 씨나 신바람 소리꾼 김 준호 씨, 성 문제 전문가 구 성애 씨 등의 공통점은 타고난 입심이다.

 

물론 그들이 각 분야에서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인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말발이 없었다면 각종 특강에 불려 다니는 스타 강사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글발로 먹고사는 교수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말발이 뛰어난 사람들이 각광받고 있다. ‘강 준만식 글쓰기로 유명한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글쓰기를 보면 공격적인 구어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술자리에서 그와 마주 앉아 토론을 벌이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하는 어법구사가 강 준만을 당대에 가장 공격적인 논객이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사회평론가의 자리에 올려놨다.

 

강 교수 외에도 칼럼니스트인 진 중권 씨나 현대사상의 주간인 김 성기 씨 등의 필체 역시 대부분 구어체를 통해 글발보다는 말발을 앞세운 글쓰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세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성은 얼굴이 잘 생겼거나, 돈이 많은 이성이 아니라 말 잘하고 편안한 사람이 일 순위로 꼽히고 있다. 이쯤 되면 이제 말발글발을 앞서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소통되는 사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TV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의 이 같은 특성이 대중문화뿐 아니라 실생활에까지 확대되어 진지함이 결여된 삶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문학평론가 하 응백 씨는 틈만 나면 말싸움으로 일관하는 정치 행태와 IMF로 인해 더 이상 즐거움이 없는 사회적 환경 등이 철학과 사상의 부재로 요약되는 세기말의 환경과 만나 생긴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이 우리 고유의 정서인 풍자와 해학과 접목되어 나름대로의 완충지대를 찾는다면 사회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글발보다 말발이 앞서게 된 사회현상에 대해 좀 더 지켜보자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훨씬 더 많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