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차
국산차 국내 소비자는 ‘영원한 봉’
주간동아 1999. 10. 14.
‘레간자, 미국 소비자 선호도 조사에서 3위로 선정.’ 대우자동차가 9월 22일 각 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자료 제목이다. 레간자가 미국 J. D. 파워사가 실시한 ‘소비자 선호도 조사’에서 국산 차론 유일하게 중형차 부문 3위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이 자료대로라면 한국 차가 미국에서 호평받는 것은 그동안 한국 차의 품질이 많이 향상돼 ‘싸구려 차’ 이미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만하다. 더구나 자동차와 정보통신 부문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고객만족조사 및 컨설팅회사인 J. D. 파워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미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번 보고서 발표로 레간자를 비롯한 대우 차의 제품 이미지 제고는 물론 현지 판매가 크게 활성화될 것”이라는 대우의 기대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실상은 그와 반대다. 우선 대우차가 보도자료에서 인용한 선호도 조사란 상품성 조사(원문은 APEAL이라 되어 있음)의 오역으로, 상품성 조사란 새 차 보유자들을 대상으로 자동차 단품 등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물어 종합한 결과다. 자동차 품질을 측정하는 것은 초기 품질지수 조사로, 한국 차들은 이 조사에서 여전히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수출적자 내수시장에서 보전”
J. D. 파워 코리아 이훈행 팀장은 “한국 차에 대한 상품성과 초기 품질지수조사 결과가 이처럼 크게 엇갈리는 것은 품질에는 자신이 없는 한국 자동차업체가 당장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제공, 상품성 측면에서 어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최근 들어 미국시장에서 한국 차 판매가 급신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상품성을 높여 미국 구매자들을 끌어들이는 한국 차의 이런 판매 행태가 그동안 한국 차를 구매해 왔던 국내 소비자들의 불만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자동차 업체에 국내 소비자들은 ‘봉’이고 외국 소비자들은 ‘상전’이라고나 할까. 알뜰살뜰 절약해 어렵사리 자동차를 장만했는데 구입한 지 얼마 안돼 고장이 난다거나, 몇 번을 수리해도 늘 불안한 데도 자동차회사로부터 더 이상 무상수리가 안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소비자들로서는 불만을 가질 만하다.
그동안 국내 소비자들은 똑같이 국내 자동차 업체가 만든 상품을 놓고도 가격, 애프터서비스, 피해보상 등에서 외국 소비자에 비해 불리한 대접을 받아왔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가격만 해도 그렇다. 옵션이 서로 달라 평면적으로 비교하긴 힘들지만 과거 국산 차의 미국시장 가격이 국내 시장 가격보다 훨씬 쌌던 것은 잘 알려진 일.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이후 달러 환율이 올라 상황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과거에는 수출에서 발생한 적자를 내수 시장에서 보전해 왔다”라고 털어놓았다. 품질보증 기간 역시 마찬가지. 현재 현대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파워트레인(엔진과 트랜스미션)은 10년 10만 마일, 범퍼는 5년 6만 마일, 자동차부식 5년 10만 마일을 보증해주고 있다.
대우차는 기본 3년 3만 6000마일, 파워트레인 3년 6만 마일을 보증해주고 있다. 반면 국내 소비자는 소비자피해보상 규정상 2년 4만 km의 보증만을 제공받고 있다. 보증기간 차이뿐인가. 자동차를 조금 오래 타고 다닌 사람이라면 고장이 나도 부품구입이 힘들어 애를 먹은 경험을 한 두 번 갖고 있을 것이다.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 엘란트라의 경우 초기 모델과 후기 모델의 후미등이 서로 달라 초기 모델 보유자들이 후미등 교체에 애를 먹은 적도 있다”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외국 자동차업체의 경우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GM코리아 원남연 부장은 “미국의 경우 10년 이상 자동차보유가 보통이기 때문에 부품공급 기간이 훨씬 길다”면서 “국내에서 운행되는 캐딜락 83년형의 경우 한 달 이내에 부품공급이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단종 후 부품공급 7년’ 규정 구속력 없어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 대표 임기상 씨는 “우리의 경우 승용차 교체주기가 3년 8개월인 반면 일본은 9년 5개월, 미국 7년 10개월인 점에서 알 수 있듯 우리의 자동차소비생활은 지나치게 비경제적인데 자동차회사들이 부품공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은 점도 잦은 교체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현행 소비자피해보상 규정에 따르면 단종후 7년 동안 부품을 공급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감가상각을 고려해 자동차회사가 해당 차를 인수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업체 관계자들도 이 규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상태. 특히 올해 들어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 철수로 SM5 시리즈를 단종한(삼성차 해외 매각이 이뤄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삼성자동차 관계자 역시 이 규정을 정확히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관계자는 “생산된 때로부터 7년 동안 부품을 공급하도록 돼 있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규정이 재정경제부 고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는 점.
결국 최악의 경우 SM5 보유자들은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급발진사고 피해자들의 경우에서 보듯 국내 자동차 보유자들은 안전에 관한 한 외국인과 달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것도 문제다. 급발진사고는 이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80년대에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가 원인 규명에 나서 대책을 마련했던 사안. 그러나 우리의 경우 작년에 언론에 피해 사례가 보도되는 등 문제가 되자 뒤늦게 합동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원인 규명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고 있다. 정부는 11월 말 조사결과를 발표할 방침이다. 지금까지 국내 자동차 보유자들은 미국 소비자들과 달리 급발진사고 예방대책 혜택도 만족스럽게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90년대 초반 이후 급발진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차 제조사로 하여금 시프트 록 장치(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만 자동기어 조작이 가능한 장치) 장착, 올바른 운전조작 홍보 등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90년대 초반부터 미국 수출차량에는 모두 시프트 록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내수용 차량은 일부에만 장착된 상태. 현대자동차 최한용이사는 “유럽에서는 시프트 록 장치 장착을 권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프트 록 장치가 있어도 급발진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안전도 안전이지만 막상 자동차사고가 났을 경우 피해보상에서도 국내 소비자들은 외국 소비자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자동차 보유자들은 자동차 결함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을 경우 자동차 회사의 고의 과실을 자신이 입증해야 비로소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제품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소비자가 이를 입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어서 피해보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외국차 국내 상륙이 ‘자극’될 수도
반면 미국 등 선진국의 소비자들은 똑같이 한국 차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 해도 자국의 제조물책임법(PL 법)에 따라 한국 자동차업체의 고의 과실을 입증하지 않아도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 정부도 뒤늦게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PL 법 정부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PL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더라도 그 시행시기를 공포 후 1년 6개월이 경과한 날로 정하고 있어 정부의 소비자보호 의지가 의심받고 있다. 자동차업계에서는 PL 법 조기 시행은 자동차업체의 부담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외국 자동차업체와 충분히 경쟁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당분간 시행을 보류해야 한다면서 3년간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자동차업체의 치열한 로비로 국회 심의과정에서 유예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은 시간만 주면 우리도 외국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해 왔는데,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이 정말 없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63년 새나라자동차가 공장을 세워 자동차를 생산할 무렵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혼다가 20년도 채 안돼 세계의 혼다가 됐음에도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아직도 정부의 보호만을 바라고 시간타령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비단 자동차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소비자권리나 안전문제는 국내 산업육성을 명분으로 국내 시장을 보호해 온 정부나 온실 속에서 성장해 온 기업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소비자운동에 나서고 외국 차가 국내에 본격 진출, 경쟁적 시장 구조로 바뀌어야 국내 업체들이 품질 향상이나 고객 서비스 측면에서 자극받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 소비자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환경이 바로 곁에 와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