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양 농락한 목자
시사저널 1999. 10. 7.
JMS 정명석의 ‘성 추문’ 충격 증언 봇물 … 10여 명과 혼음, 10대 소녀들 욕보여 … 교역자가 ‘채홍사’ 노릇
국제크리스천연합(JMS)을 둘러싼 추문이 속속 불거져 나오고 있다. 기독교 선교 단체를 표방하며 80년에 출범한 JMS는 99년 2월 현재 전국에 교회 2백90여 곳과 신도 10만여 명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진 종교 집단이다(80년 당시 JMS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던 이 집단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새벽 별(Jesus Morning Star)'을 뜻했던 영문 명칭이 총재 정명석 씨의 영문 머리글자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에 따라 국제크리스천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현직 교역자와 신도 거개가 여전히 JMS라는 명칭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데다 일반에게도 이 명칭이 더 친숙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 글에서는 이 단체를 JMS로 통칭한다). JMS가 일반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서울방송의 대표적인 시사 고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지난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집단 총재 정명석 씨의 성(性) 추문을 집중 보도한 다음부터였다. 서울방송은 정명석 씨와 직접 성관계를 가졌다는 여성 10여 명의 증언을 통해 정 씨가 지난 20년간 메시아임을 사칭해 여자 신도들을 지속적으로 농락해 왔다고 폭로했다.
일부 교역자, 정명석 본떠 섹스 행각
서울방송 보도 이후 JMS를 둘러싼 의혹은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는 양상이다. JMS를 이탈하는 교역자․신도가 속출하면서 새로운 증언이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엑소더스’라는 탈퇴자 모임을 결성해 지난 7월 말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http://mathx.kaist.ac.kr/~killjms). 아직 JMS에 몸 담고 있는 사람과 일반인에게 JMS 실상을 폭로하고, 탈퇴자의 재활을 돕는다는 것이 엑소더스를 결성한 취지이다. 탈퇴자들의 증언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 정명석 씨의 이중성이다. 자기 자신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면서도 정씨는 신도들에게 엄격한 금욕 생활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JMS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이성 교제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를 어겼을 때에는 ‘이성권을 범했다’고 해서 금식 기도를 하거나 JMS 본부가 있는 월명동(충북 금산)에서 노역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탈퇴자 ㄱ씨(29)는 말한다. MS(성인 회원을 가리키는 JMS 내부 용어)신도들은 몸을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정 씨의 ‘가르침’에 따라 술․담배는 말할 것도 없고 라면․커피․콜라까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젊은 신도들이 이렇게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는 동안 50대 중반인 정 씨는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즐겼다고 한다. 96~98년 3년간 정 씨와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ㄱ씨는 “정총재를 단독 면담하러 갔다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로는 한 번도 단 둘이 성관계를 한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적을 때는 2명, 많을 때는 10명가량 되는 여자 MS들과 함께 정 씨 숙소․샤워장․컨테이너 숙소 등에서 집단 혼음을 했다는 것이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SS(고등학생 이하 청소년 회원) 출신이라는 ㅈ씨는, 고3 시절 정씨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다른 여학생 2명과 함께 방에 들어선 ㅈ씨에게 정명석 씨는 안마를 주문했다. 정 씨 어깨를 주무르던 ㅈ씨는 기겁을 했다고 한다. 정 씨가 갑자기 ㅈ씨 스웨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주물럭거렸기 때문이다. ㅈ씨는 ‘이 분은 메시아’라는 생각에 그 순간을 꾹 참고 넘겼다고 말했다. 금욕 생활을 실천했던 일반 신도들은 정명석 씨 성 추문이 세상을 뒤흔든 지금도 ‘우리 선생님이 그랬을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99년 7월부터 3년 6개월 동안 ‘무덤 기간’이 펼쳐질 것이라던 정명석 씨의 예언이 맞았다며 정 씨를 더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도들에 따르면, 정씨는 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한 예수의 생애를 빗대, JMS가 ‘앞의 역사(前史)’ 21년을 끝낸 뒤 시련기(무덤 기간)에 들었다가 2003년 부활해 ‘뒤의 역사(後史)’ 21년을 열 것이라고 예언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신도와 달리 핵심 교역자들은 일찌감치 정 씨의 성 추문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이 <시사저널>에 양심선언을 감행한 JMS 현직 목사 ㅇ씨의 증언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 교역자 가운데 일부가 정명석 씨를 본뜬 섹스 행각을 일삼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97년 벌어진 이른바 ‘부평 사건’이다. 이는 당시 부평의 한 교회 목회를 맡고 있던 한 아무개 목사가 여자 신도 3~4명과 남몰래 성관계를 지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지역 차원에서 묻힐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소식을 접한 정명석 씨가 한 씨를 본부(월명동)에 소환하자 JMS 내부에 알려졌다.
한목사는 1주일간 금식 기도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단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금식 기도가 끝나는 날 정명석씨는 다시 부평 지역 전도사와 일반 신도 30여 명을 월명동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눈치도 못 채고 뭐 했느냐’며 부평 회원들을 JMS에서 모두 제명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이 자리에 불려 갔던 ㅈ씨는 “그때부터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구원받지 못하고 이대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울며불며 정 씨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던 전도사와 신도들은 한목사가 그들 앞에 끌려 나오는 순간 그에게 달려들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윽박지르며 한목사에게 뭇매를 가하던 그 순간을 ㅈ씨는 “인민재판이 따로 없었다”라고 회상한다. 당시 한목사는 자신이 관계했던 여성 가운데 2명이 낙태한 사실을 털어놓았고, 그 길로 JMS를 떠났다.
교역자들의 비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부 교역자들은 정 씨의 성 추문을 알면서도 여성들을 그에게 ‘바친’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채홍사’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교역자가 서울의 ㄱ씨․ㅂ씨이다. 이들은 정씨가 총애할 만한 여성, 곧 키 165㎝ 이상으로 피부가 곱고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여성을 줄줄이 전도해 정 씨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이 중 서울 명동 일대를 전도 무대로 삼았던 ㅂ씨는 “95년부터 내가 전도해 ‘30 개론(JMS 핵심 교리)’을 통과시킨 사람만 7백여 명인데, 그중 백여 명을 보고자로 키웠다”라고 말했다. 보고자란 지역이나 대학 캠퍼스 선교 현황을 본부에 보고하는 직책으로, 정명석 씨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많은 만큼 용모가 출중한 여성을 주로 뽑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런데 전도를 시작한 지 2~3년 만에 자기가 키운 보고자로부터 정 씨와 관계를 가졌다는 고백을 듣고 성 추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명석은 같이 잔 여자만 믿는다”
성 추문을 알고 난 뒤에도 ㅂ씨는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주변에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이것이(메시아의) 섭리인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 ㅂ씨의 말이다. 문제는 이같은 교역자들의 비리가 상당 부분 정명석 씨의 통치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정 씨는 성(性) 윤리뿐 아니라 조직 운영 방식도 이중적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JMS는 ‘왕벌 조직 체계(또는 부챗살 조직 체계)’였다고 탈퇴한 교역자 ㄱ씨는 말한다. 왕벌 한 마리를 중심으로 일벌 수천 마리가 연결되듯 정 씨와 1 대 1 관계로 맺어진 회원들이 JMS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이 늘어나면서 정 씨 눈에 띄는, 다시 말해 처세가 뛰어난 교역자가 ‘잘 먹고 잘 사는’ 현상이 나타났다. 정 씨 눈에 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질’의 보고자를 발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뽑힌 보고자들을 정명석 씨는 이중으로 활용했다.
하나는 성 노리개, 다른 하나는 교역자들을 견제하는 도구. 지역에서 생긴 일을 정씨에게 시시콜콜히 보고하는 이들 보고자를 교역자는 눈엣가시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ㄱ씨는 말한다. 정 씨가 성(性)을 단순히 향락 아닌 조직 관리수단으로 이용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교역자는 정 씨에게 받은 인상을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는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가 아니면 믿지 않는다.” 정 씨가 JMS 운영에 피붙이를 적극 끌어들인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의혹을 낳는다. 6남 1녀 중 3남이었던 정 씨는 90년대 중반 자신의 남동생 3명을 본부에 모두 끌어들였다.
수행 비서․운전사 따위 직책을 맡게 된 이들이 핫 라인을 통해 정보를 가로채고 보고 경로를 독점하면서, 교역자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 들었다는 것이 탈퇴한 교역자의 주장이다. 특히 이들 형제는 89~95년 서울에 있던 JMS 본부를 월명동으로 옮기기 위한 공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각각 돌 구매와 공사 총책임을 맡으며 상당한 뒷돈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JMS 한 관계자는 최근 공사 전 과정에 대한 자체 감사를 벌이려 했으나 물품 구입 때 견적서를 주고받은 기록조차 없어 감사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회원들 ‘앵벌이’시켜 번 돈 착복 의혹
정명석씨가 자기 형제들을 통해 음성 수입을 관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JMS 재산은 본부(월명동) 땅과 건물, 사단법인 동서크리스천연합 명의로 되어 있는 21억 원가량이 전부라고 JMS 관계자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JMS가 벌인 각종 수익 사업을 고려하면 비자금 규모가 수십억 원대를 넘어서리라는 것이 한 탈퇴 교역자의 추측이다. 가장 대표적인 수익 사업이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한 땅콩팔이이다. 불우 이웃 돕기․심장병 어린이 돕기 따위를 빙자해, 거리와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봉지에 담은 땅콩을 파는 이 일을 JMS 탈퇴자들은 ‘앵벌이’라고 자조한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다. 2명이 조를 짜 나가면 ‘하루 평균 15만 원, 많을 때는 20만 원까지도 벌었다’는 것이 97년 JMS를 탈퇴한 ㅇ씨(대학원생)의 말이다. 땅콩뿐만이 아니다. 비누․세제․정수기․자동차 백미러, 심지어 지역에 따라서는 붕어빵까지 팔았다고 탈퇴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본부에 귀속되었다. JMS 본부는 실적이 우수한 교회를 표창하며 수익 사업을 독려했다. 수익 사업의 경우 JMS본부는 십일조와 달리 총수입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벌어들인 수입이 정 씨 비자금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탈퇴자들은 주장한다.
JMS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MS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의혹은 여전하고, 피해자들의 상처 또한 그대로이다. JMS에 같이 입문했던 여자 친구가 정명석 씨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93년 탈퇴했다는 ㅇ씨는, 정상 생활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정명석 씨 성 추문이 불거지면서 JMS를 탈퇴했다는 한 20대 후반 여성은 “막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본부 MS로 20대 청춘을 바쳤다는 한 여성은 “친구들이 보고 싶은데 JMS에서 보낸 지난 10년간 연락이 모두 끊겼다”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수많은 젊은이의 삶이 파괴되었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지난 3월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을 앞두고 출국했던 정명석 씨는 6개월째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는 JMS 핵심 교역자들은 신도들의 상처를 다독이기는커녕 헤게모니 다툼에 정신이 없다. 피해자들의 진정서를 접수한 검찰은 ‘정식 고소가 있기 전에는 수사하기 어렵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땅에 정의는 있습니까.” JMS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면서 비용․절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엑소더스의 절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