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유행, 도대체 누가 만들까?
뉴스플러스 1999. 9. 16.
가을이 온 것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것은 역시 쇼윈도다. 올 가을 멋쟁이가 되고 싶다면 손으로 직접 짠 듯한 스웨터에 동물무늬 스커트를 입고 화려하게 구슬을 박아 넣은 집시풍의 백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스커트 무늬는 얼룩말이든 누런 젖소든, 흰 젖소든 상관없지만 노란색 호랑이 무늬는 안된다. 작년에 누런 호피 무늬가 유행했기 때문에 올해 이런 프린트를 입는다면 유행에 처진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패션에서의 유행이란 이런 것이다. 어떤 것도 전적으로 새롭지는 않지만, 어떤 것도 옛날과 똑같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보들리야르나 베블렌 같은 사회학자는 유행이 계급 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면서 소비를 자극할 뿐이라고 비판했지만, 변덕스런 유행이 인간을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해방시키는 긍정적 기능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유행이 ‘사람들이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삶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프링즈, ‘패션, 개념에서 소비까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패션에서의 유행은 당대의 경제, 사회, 철학적 분위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미국의 경기 호황덕에 미국 디자이너들이 유럽 디자이너를 압도함으로써 세계 패션의 흐름이 미국적(실용적이고 상업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나, 미술과 건축에서 유행하는 인간의 ‘몸’이 패션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이 그 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대의 흐름을 간파해 유행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유행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파리와 밀라노, 뉴욕 등의 패션쇼를 지배하는 장 폴 고티에나 라거펠트, 마이클 코어스 같은 톱 디자이너들이죠. 본 시즌보다 6개월 앞서 이들의 디자인이 나오면 우선 바이어나 패션 기자들에 의해 좋고 나쁜 것이 가려지죠.”
올 가을 스웨터 얼룩소무늬 대유행
파리와 뉴욕 등 패션 중심지의 정보를 국내 250개 패션 브랜드에 전달하는 인터패션플래닝의 이경희실장의 설명. 외국의 톱 디자이너들이 히피풍의 옷을 내놓아 호평받으면 국내 브랜드들이 일제히 히피적 요소를 트렌드로 받아들이고, 뉴욕에서 극히 과장된 선이 주류가 되면 우리 브랜드들도 부푼 옷깃과 소매를 만들어 내는 식이다. 올 가을에 강세를 보이는 스웨터와 얼룩소 무늬의 경우 미국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가 발표한 것인데, 몇몇 국내 브랜드의 광고는 그의 옷을 그대로 ‘카피’한 채이고, 이런 광고들이 잡지에 실리자마자 의류 도매 시장과 길거리엔 일제히 얼룩소 무늬가 깔렸다. 이처럼 톱 디자이너→디자이너 브랜드→대량생산 브랜드→시장의 순서로 유행이 전파된다는 것이 유행에서의 일반 이론이지만 70년대 이후에는 역류 현상도 자주 벌어진다.
“히피나 그런지, 펑크 등 하위문화의 예술가들이 톱 디자이너들의 오트 쿠튀르에 영감을 주죠. 톱 디자이너들이 일부러 청바지를 너덜너덜하게 찢어서 엄청난 가격에 파는 것이죠.”(동덕여대 의상학과 최현숙교수) 오늘날 유행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연예인들이다. 지난 대선에 대통령 후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입었던 ‘유동근 와이셔츠’, 서태지의 힙합 바지, 김혜수의 ‘누드 목걸이’, 최진실의 ‘귀고리’, 모델 변정수의 ‘두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행이 반짝 인기를 누리고 나타났다 사라져 간다. 이들 중 대부분이 일과성 유행(‘파드’)이지만 어떤 연예인들은 패션 리더로서 패션 산업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최근 ‘리엔’이라는 새 패션 브랜드를 선보인 이정아실장은 “오늘날 패션업계에서 스타 마케팅은 정말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이실장은 “어떤 연예인이 어떤 옷을 입고 나오면 다음날 바로 반응이 온다. 패션 리더들의 주요 대화는 전날 본 TV에서 누가 무엇을 입었는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탤런트 유 모 씨가 한 드라마에서 오렌지색 G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나온 다음날 그 가방은 줄을 서서 살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래서 대개 패션 브랜드에서는 연예인 담당자들을 두고 연예인들에게 의상 ‘협찬’을 한다. 방송위원회에서 끊임없이 간접 광고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지만 소용이 없다. TV에 의류 회사의 로고가 나가지 않아도 유행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한눈에 어디에서 그 옷을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패션업계에서는 탤런트 김희선 황신혜 이미숙을 최고의 ‘상품 진열대’로 꼽는데 특히 김희선이 입은 옷이나 액세서리는 곧바로 시장에서 대량 생산해 하루아침에 유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 유행을 ‘창조’한다면 유행을 대중화하는 집단이 소위 ‘패션 리더’다. “우리나라의 패션리더는 평균 24세 정도고 여성임을 스스로 자랑하는 커리어 우먼들입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자신에 맞게 소화할 능력이 있고, 트렌드 상품보다 명품을 선택하죠. 이들은 타고난 미인 김희선보다 자기 관리에 엄격한 심은하나 이미숙을 모델로서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리엔’, 이정아실장)
세계 유행 굽 낮은 구두 한국선 안 통해
물론 톱 디자이너의 옷이나 연예인의 패션이 모두 유행하는 것은 아니다. 한 디자이너는 “패션은 서구 여성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다. 그래서 가슴이 빈약해 보이거나 다리가 짧아 보이는 디자인은 절대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굽 낮은 구두가 유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힐이 더 잘 팔린다. 또 외국에선 스포티브 한 디자인이 유행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상대적으로 약세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비싼 돈을 낼 바에야 폼나는 정장을 산다”는 게 국내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완전히 유행에 무감한 사람들도 있다. 바지 길이가 좀 짧아지든 길어지든, 재킷 단추가 두 개든 세 개든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의 정신적 행복과 편안함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패션 리더가 될 만하다. 자신의 근원에 대한 탐구, 오래된 것에 대한 향수가 미래의 패션 테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회와 패션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누구도 유행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써야 존재 의미가 있는 패션 리더들은 티베트 산 양털 숄과 골동품 구슬백을 사기 위해 난리 법석이지만, 낮은 신발에 발목을 살짝 가리는 바지, 배낭을 메고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당신은 유행의 맨 앞 열에 서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