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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자! 놀자! 놀고 일하자!

 

한겨레21 1999. 8. 26.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 잡혀 있다.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열정이 어찌나 강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성직자와 경제학자, 도덕가들은 이런 정신 나간 생각에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성스런 광채를 드리우고 있다.”

 

알코올과 니코틴의 거대한 무덤

폴 라파르그(18421911)1883년에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그는 사회주의운동가였고, 노동이 모든 가치의 실체라고 주장한 칼 마르크스의 사위였다. 그런 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했으니 묘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노동이라는 악덕에 중독돼 몸과 영혼이 황폐화한 현실을 개탄한다. 그런 뒤 노동은 신성하다는 자본주의 윤리를 깨고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하자고 말한다. 그는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런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점을 예견하고 있다. “노동이 단지 게으름의 쾌락을 위한 양념에 불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은 나의 힘을 넘어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가 우려했던 대로 흘러온 듯하다. 주부 박 아무개(35)씨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일찍 나가야 되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저도 남편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때부터 남편은 “먹고살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모른다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박 씨는 “사는 게 허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격무에 시달려 일만 쫓아간 남편의 생활이 부인한테 우울증세를 유발한 것이다. 이홍식 교수(영동세브란스병원 정신과학)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다가는 자신은 물론 가족한테까지 상처를 준다최근에는 인원감축으로 한 사람이 해야 할 업무가 늘어나, 일중독에 빠질 위험성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말한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월급쟁이를 일에 더욱 바짝 달라붙게 강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이들이 감내해야 할 스트레스와 피로감도 증가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지난 1월 소속 조합원 1274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78.6%가 지난해와 비교해 육체적 피로가 늘었다고 대답했다. 특히 스트레스가 늘었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은 무려 92.1%나 됐다.

 

스트레스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게 흡연량과 음주량이다. 흡연과 음주는 스트레스의 대표적인 행동적 증상으로, 사회구성원이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유럽의 통계조사기구인 유러모니터가 지난 97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세계 최고의 골초이다. 흡연인구 1인당 연간 흡연량이 4153개비로 당당히세계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일본(1인당 2739개비)이나 3위인 헝가리(2689개비)는 한국을 따라오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인은 1인당 1836개비로 한국의 절반도 안 됐다. 음주량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남녀가 1인당 마신 술은 위스키 반 병, 맥주 95, 소주 74병 꼴. 알코올 남용의 영향을 받는 간암 사망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한 수치다.

 

IMF 이후 과로사 엄청 늘었다

한국에서는 드물게 여가문화 연구로 한우물을 판 김문겸 교수(부산대 사회학)는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퇴근 뒤에 술자리가 잦을 수밖에 없다. 강도 높은 노동과 경쟁에 오랫동안 시달려, 자신을 계발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경제위기 여파로 인해 직장은 삭막한 황무지로 변했다. 정리해고에 따른 실업의 위협과 연봉제 확대는 직원들 사이의 경쟁을 더욱 부채질한다.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이 직장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과로사 증가에서도 그 냉혹함은 확인된다. 지난 6년 동안 뇌혈관 및 심장질환 관련 사망자(과로사) 현황을 살펴보면 과로사는 96년까지 늘어나다 97년에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구제금융 사태를 겪은 지난해 다시 크게 늘어났다.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올해 6월까지의 과로 인정건수도 45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28건보다 22건이 늘어났다. 총 산업재해자 가운데 과로 인정건수가 차지하는 비율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일터에서 게으름의 권리가 파고들 틈은 비좁다. 실업자는 줄어들고 있다 하더라도 130만 명에 이르고, 실업률은 6%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한테는 게으름의 권리라는 말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지런함은 선()이요, 게으름은 악()이라는 윤리관도 뿌리 깊다.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구호가 더욱 거세지고 있는 판국에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자는 말이 귀에 들어 올리 만무하다. 그러나 고실업사회를 앞둔 때에 오히려 일과 여가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이는 노동 시간을 줄이자는 사회적 논의에 힘입은 바도 크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과)우리 국민이 일을 적게 해 경제위기를 부른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는 고도성장만을 추구했던 경제 패러다임의 산물이다”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고를 깨야 할 때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는 여가를 노동력의 재충전 시간으로 여겼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쉰다는 일의 연장선에서 여가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여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자아실현을 위한 창조활동이다.” 여가를 얻기 위해서 강 교수는 게으름의 권리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게으름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약육강식의 경쟁체제가 부지런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틀을 깨기 위해서 게으름의 권리를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개미들이여, 베짱이를 부러워하라

부산대 김문겸 교수는 일에 얽매인 직장인한테 단순하고 일상적인 질문에서 출발하라고 권한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김 교수는 여가를 보내는 방법도 교육을 통해 훈련받아야 한다무엇보다 일이 구속하는 상태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일과 여가가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노동과 창의적인 여가가 균형 잡힌 생활이 바로 건강한 삶이다. 베짱이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감상할 줄 모르는 개미는 그냥 일벌레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다음 말은 한번 새겨볼 만하다. “생활은 일과 여가, 그리고 전쟁과 평화로 구분되며, 행위는 필요불가결한 것과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구분된다.전쟁은 평화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고, 일은 여가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고.”(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