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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살아도 계약직은 죽는다

 

한겨레21 1999. 7. 29. 

 

7월 1일 홍 아무개(27․여)씨는 아무 말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연봉 1004 만원, 12달로 나누면 월 92만 원인 셈이다. 지난해 7월 맺었던 계약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면담을 끝냈다. 생리휴가까지 제껴가며 1년을 버텼다. 꼬박꼬박 휴가를 쓰면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려웠다. 밉보여 회사 쪽이 계약하지 않겠다면 그만이었다.

 

일은 똑같은데 월급은 절반

그는 카드회사에 11년째 근무하고 있다. 세금을 떼면 80만여 원이 한 달 벌이다. 계약직으로 바뀌기 전만 해도 그의 연봉은 2700여만 원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올해는 연봉이 정규직이었을 당시의 1/3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때 입사했던 정규직 남자 직원의 연봉은 3천만 원에 육박한다. 정규직과 급여 차이가 너무 큽니다. 50명이 계약직으로 전환됐는데, 벌써 절반이 그만뒀습니다. 1년쯤 지나면 나머지도 모두 떠나겠지요.” 홍 씨도 이제는 우리 회사란 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그를 언젠가는 나갈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 상실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규직과 계약직. 외환위기는 평생 고용에 익숙한 직장 문화를 바꿔놓았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라도 이제는 신분이 달라졌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정규직보다 연봉계약직을 선호하고 있다. 경기에 따라 인원을 쉽게 조정할 수 있고, 복지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하면 인건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지는 장점도 있다. 정부나 기업들은 앞으로 계약직을 계속 늘려나가겠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계약직 노동자는 이미 급증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임금노동자 가운데 임시일용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많아졌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용근로자는 외환위기 직전인 9711692만 9천 명에서3월에는 599만 5천 명으로 줄었다

 

반면 임시직일용직 근로자는 614만 4천 명으로 늘어 처음으로 상용직이 절반 이하(49.4%)로 떨어졌다. 5월에는 595만 8천 명(47.5%)까지 줄었다. 반면 임시일용직은 계속 늘어 5월에는 658만 9천 명에 이르고 있다. 경기가 나아지면서 인력수요가 늘고 있지만, 기업들은 정규직보다 임시일용직을 주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 이병직 사무관은 경기가 나아지면서 기업들이 임시일용직 고용을 늘리고 있다면서 정규직 채용이 적은 것은 아직 경기가 호전되리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규직에 비해 세금도 더 내

계약직은 대부분 해마다 연봉계약을 맺는다. 35년 계약을 맺기도 하지만, 극소수 전문직종에 한정돼 있다. 1년 단위로 연봉계약을 맺은 다음 이를 12달로 나눠 월급을 받는다. 교통비나 식비, 시간 외 수당 등은 따로 없다. 전세자금, 학자금 지원 등 각종 복리후생혜택도 이들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정규직에 비해 세금도 많이 낸다. 매달 받는 급여총액을 모두 수입으로 간주해 세금이 부과되기 때문이다. 세금은 특히 공기업에서 큰 문제가 된다. 연봉계약직인 정부출자기관의 김 아무개(35) 과장은 “정부투자․출연 기관 직원들의 급여는 교통비, 체력단련비 등 세금을 내지 않은 각종 수당이 월급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우리는 매달 받는 돈이 전부 과세대상이 돼 정규직의 배 가까운 세금을  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민은 돈 문제가 아니다서울의 모증권에 다니는 이 아무개(30․여)씨는 지난해 12월 말 회사를 옮겼다.

 

지난해 7월 회사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문을 닫자 11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떠나 연봉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전 직장 동료들은 다른 곳에라도 갈 데가 있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 씨 앞에 놓인 상황은 달랐다. “첫 출근했을 때 서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는데, 앉아서 고개만 들고 쳐다볼 뿐 아무도 인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 밥그릇을 차러 왔다는 생각에서였죠. 겁이 나더라고요.” 격주 휴무인 토요일에 맞춰 올 1월에는 월차휴가를 내려했다. 그러나 계약직은 휴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밤 12시까지 일해도 시간 외 수당은 일절 없었다. 증시가 활기를 띠는 바람에 최근 정규직 사원들은 두 차례 특별상여금을 300400%씩 받았지만, 그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정규직들끼리 쉬쉬하면서 그런 사실을 숨기려 합니다.

 

우리가 기죽어 있어 미안하기도 해서겠죠.” 정규직원들은 계약직원을 ‘외인부대’ 라거나 심지어는 떨거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는 우리를 뜨내기로 취급할 때 가장 슬프고, 회사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모두 사라진다”라고 말한다. 계약직은 노조에서도 배척당한다. 노조 모임 때 계약직원은 창구를 지키고 정규직만 회의를 연다. 노조가입에 법적 제약은 없으나, 노조나 계약직원 양쪽 다 가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경영사정이 악화되면 계약직원을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데 회사나 노조 모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직원들은 1년 뒤 재계약을 장담할 수 없고, 노조활동이 계약을 맺는 데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해마다 계약을 맺기 위해 눈치 보며 발버둥 쳐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대부분의 계약직원들은 이 씨처럼 정규직으로 전환을 희망한다.

 

대량실업시대에 안정된 일자리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연봉계약을 선호하는 계약직원도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이들이다. 박 아무개(34․여)씨는 지난해 9월 한 정부출자기관과 연봉계약을 맺었다. 국제금융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한테 헤드헌터사를 통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9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옮겼다. “정규직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곳보다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물론 내가 이곳에 계속 있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는 정규직 전환을 바라지 않는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연공서열 중심의 정규직 급여체계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급여와 근무조건이 나빠질 가능성도 있다. 박 씨는 “연봉계약제에 대한 사회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직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치보다는 어디에 몸담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안정된 직장이 없으면 이상하게 봅니다.” 계약직원들은 직장에서도 정규직 사원들의 텃세를 느낀다. 아래 직원들이나 상급자들이 정보를 잘 주지 않는다. 어차피 나갈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회사의 주요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전문직종을 연봉계약제로 뽑아놓고도 변하지 않은 직장 문화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한다. 박 씨는 “더 많은 보수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으로 언제든지 옮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 씨와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박 씨가 근무하는 정부출자기관도 지난해 800여 명의 퇴출은행 직원들을 일반 계약직으로 뽑았다. 급여는 전 직장의 6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미 100여 명이 회사를 그만뒀다.

 

계약직 노동자 보호할 법 급하다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봉계약제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최근 조사결과 기업들은 파트타임제 등 임시직 노동자를 현재 23.7%에서 38%까지 늘리겠다”라고 대답했다. 기업으로선 당연히 비용이 적게 드는 임시직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소수 억대 연봉자의 그늘에 가려 매일매일 불안에 떨며 최저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노동자는 늘어나는 셈이다. 민주노총 주진우 조사통계국장은 대부분의 계약직원은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 장시간 노동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법적으로 계약직 노동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모든 임직원이 연봉계약직이 아닌 곳에서는 계약직이 정규직에 비해 급여와 근무조건 등이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연봉계약직이 정착되기 전까지만이라도 계약직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시행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