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
오래된 연고에 상처 덧난다
한겨레21 1999. 7. 29.
어느 집이나 서랍 속에 잘 안 쓰는 연고 몇 개씩은 들어있게 마련이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이 연고를 재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사실 피부과 진료를 하다 보면 처음부터 병원을 찾는 사람보다는 여러 가지 연고를 바르다가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고제가 의사의 처방 없이 쓸 수 있는 약 아닌 약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약국에서 자가구입을 하거나 집에 있는 연고들을 재활용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긁어 부스럼’이란 말처럼 그냥 원상태로 병원을 찾으면 쉽게 치료될 피부병을 상당수의 환자들이 진단의 어려움과 함께 치료기간이 연장되는 불편을 겪게 되고, 급기야 흉터까지 남는 경우도 생긴다.
진료실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연고제 오남용의 예와 그 부작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무좀이나 완선 등의 진균감염 또는 농가진 등에 스테로이드 연고(흔히 습진연고)를 바른 경우 균에 영양분을 준 셈이므로 악화되고 내성균이 생길 수 있다. △ 여드름이나 모낭염에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해 악화시키는 경우와 아예 연고 남용으로 생긴 여드름 △ 스테로이드 연고로 인해 임산부처럼 살이 튼 경우 △ 얼굴에 습관적으로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 벌겋게 변해버린 모세혈관 확장증(특히 아기 얼굴에 너무 강한 성분의 연고를 바르면 실핏줄이 늘어난다) △ 진물이 흐르는 병변은 우선 습포를 해야 하는데 연고를 발라 악화시킨 경우 등등이다.
연고를 재활용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만 제대로 지켜도 이런 부작용들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연고의 성분과 용도를 정확히 표시해 놓는 일이다. 약한 성분과 강한 성분의 스테로이드 연고, 항생제 연고, 항진균제 연고, 소독약 등으로 분류해 두는 것이 연고제 오남용을 막는 지름길이다. 분류가 어려우면 피부과 진료를 받을 때 연고를 가져가 설명을 듣는 것도 방법이다. 둘째, 사용법을 지키고 너무 많이 자주 바르지 않는다. 많이 바르고 자주 바르는 것은 질병을 낫게 하기보다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셋째 급성기 피부 질환, 즉 물집이 있거나 진물이 날 때는 연고를 바르지 말고 습포를 하거나 로션형태(물약)의 약을 써야 한다. 넷째 보통 2~3년간 약효가 있으므로 오래된 것은 미련 없이 버린다.
보관은 냉암소 즉 서늘한 곳이나 냉장고(냉동실이 아님)에 하는 것이 좋다. 외국에서는 1% 이하의 히드로코터손(약한 스테로이드 성분) 제제 이외에는 의사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아직 의약분업이 시행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100배 이상 역가가 강한 연고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어 이에 따른 부작용이 심각한 상태다. 앞으로 실시될 의약분업제도 아래에서는 선진국 수준의 엄격한 연고제 분류가 이루어져 현재 만연하고 있는 스테로이드 연고제 오남용이 제도적으로 억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