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cs 2024. 6. 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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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를 표현한다. 피어싱에서 삭발까지

 

뉴스플러스 1999. 7. 22.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란 말이 있었다. 옛날 얘기다. 1999년 서울 압구정동이나 신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귀와 코, 배꼽과 혀에 구멍을 뚫고 장식을 넣는 피어싱(piercing)을 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는가 하면 문신을 하기 위해 이태원을 기웃거리는 평범한젊은 연인들도 있다갈색의 가벼운 염색이 아니라 오렌지나 파란색으로 완전히 머리색을 바꾼 젊은이들은 너무 흔하다. 또 요즘 멋쟁이 남성들이 한 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헤어스타일은 노란색 머리도 초록색 머리도 아닌 백구란다. 그중 상당수는 펑크(Punk)의 후예를 자처하고, 또 상당수는 그와 상관없이 유행으로 자신의 몸을 장식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2, 3년 전 유학이나 이민 경험자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보이던 피어싱은 이제 압구정동에 보디 피어싱전문점들이 3, 4개 영업을 하고 있을 만큼 빠르게 대중화하고 있다.

 

예쁜 코끼리란 피어싱 전문점에서 만난 한 남성은 귀에 4개의 플라스틱 링을 끼고 있었다. 서울의 한 명문대생인 그는 그냥 재미있잖아요라며 웃었다. 매니저 안철민 씨는 “올초부터 갑자기 손님도 늘고 가게도 늘었다”라고 말한다. 피어싱은 말 그대로 바늘로 구멍을 뚫고 의료용 스테인리스 장식이나 플라스틱 장식을 밀어 넣는 것이다. 귓밥을 뚫고 귀고리를 하는 정도는 이제 일반적이지만 피어싱이라고 하면 구멍을 넓히고, 개수를 늘려 가는 취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석 달 이상 걸려서 구멍을 점점 넓혀가면서 20mm 파이프를 귓밥에 넣는 피어싱을 하기도 한다(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처럼 귀에 휑하게 구멍이 뚫린다). 요즘은 혀나 배꼽의 피어싱이 유행이어서 마침 예쁜 코끼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혀에 구슬을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피어싱’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테크노 뮤지션 김동섭 씨(26)는 “23개인가, 24개인가 뚫었는데 더 뚫을 곳을 찾고 있다”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낀 것처럼 요즘 사람들은 금속, 전자기계와 더 친근하지 않은가요?” 그는 뮤지션으로서 중요한 오감과 관련이 있는 부위에 피어싱을 함으로써 을 얻었다고 말한다. 특히 예술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몸을 함께 표현하는 것이 예술적으로도 효험이 있다고 말했다. 문명화하지 않은 아프리카나 동양의 소수 종족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신체 훼손과 장식물의 주술적 믿음을 이들도 갖게 됐는지 모른다. ‘허벅지밴드의 안영노 씨는 “몇 달 전 염색을 했는데 음악적 능률이 올랐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노랑머리로 방송에 출연해 물의를 빚은 언더록밴드 노바소닉의 김영석 씨도 “확실히 무대에서 효과가 있다”라고 했다. 피어싱이나 염색, 문신, 삭발 등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내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는 의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염색은 머리칼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피어싱과 문신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물론 김동섭 씨처럼 그 고통을 즐기는 피어싱 마니아들도 있고 피어싱을 한 사람들은 대개 약간 따끔한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혀에 피어싱을 한 남학생은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너무 아팠다”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게다가 문신은 의료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의사들이 피어싱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고 일부 국가에서는 18세 미만 청소년이 피어싱을 하려면 부모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몸에 손을 대는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남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김동섭 씨나 삭발을 한 여성 그래픽디자이너 이정라 씨는 단지 외모 때문에 낯 모르는 노인들로부터 수모를 당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머리색을 바꾸거나 피어싱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재미있어서’, ‘호기심으로라고 말한다. 그러나 삭발은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요란하게 눈화장을 한 번 해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남들의 눈길을 받지 않게 되려면 반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동덕여대 의상학과 최현숙교수는 피어싱이나 삭발, 과도한 염색 등 이 반전,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류 집단에의 소속감의 확인이란 의미가 크다”라고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피어싱이나 염색이 상륙한 과정이 록, 펑크, 테크노 등의 클럽 문화와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에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김영석 씨는 “록을 하지만 가끔 힙합 클럽에 간다. 거기서 긴 머리나 꼭 붙는 바지는 완전히 외계인이다. 외적인 모습이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테크노 음악이 정말 좋아서라기보다는 염색하고 피어싱부터 하는 캔디레이버들이 생겨난다그중 일부는 진짜 테크노 마니아가 되게 마련이다. 단순히 재미에서든, 멋 내기 용이든, 아니면 소속감의 확인이든, 이처럼 극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성사회에 대한 반발이 담겨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회적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이정라 씨도 “남자들이 예쁘다고 하는 기준에 왜 맞춰야 하는지반문했고 피어싱을 한 스타일리스트 김성일 씨는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란 말이 싫다”라고 말한다. 그는 가끔 치마를 입는다. 태어날 때부터 펑크는 대처 수상시절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반발이었고 그들에게 피어싱이나 과장된 염색은 경쟁 사회의 낙오자, 쓰레기(‘펑크의 원래 의미가 그러하듯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에 낙인을 찍는 행위이자 분노한 감정을 몸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고실업사회를 맞은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피어싱이나 문신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이후 사회가 보수화하면서 그 반발로 펑크나 테크노 같은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활발해지기 시작해 IMF를 영국 대처 시대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지금보다 나아지리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다.

 

“80년대 운동권들은 반정부 투쟁을 했지만 유니폼처럼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어요. 미래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안정지향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요즘 세대는 장래를 재보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평생의 삶으로 선택해 버리죠. 그게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고80년 세대가 세대라면 90년 세대는 피어싱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안영노) 개성 있고 다원화한 사회라는 뜻이지만 안정감이나 전망 없는 시대라는 말도 된다. 한 여학생은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 때, 가출했을 때마다 피어싱을 하나씩 늘려갔다며 아픈 기억을 보듬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마저 상품화해 팔고 있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다. 그래서 상처 없이 피어싱 한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고리들, 지워지는 스티커형 문신, 물로 쉽게 씻어지는 염색약이 이 여름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