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cs 2024. 5. 30. 06:32
728x90
반응형

꼬리에 꼬리를 무는 리스트리스트

 

뉴스플러스 1999. 7. 8. 

 

김영삼정부 들어 유행하기 시작했던 각종 리스트가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대전법조비리 사건의 이종기리스트, 원철희(전 농협중앙회장) 리스트, 최순영(신동아그룹회장) 리스트, 이형자(최 회장의 부인)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대형사건의 언저리에는 항상 리스트가 뒤따랐다. 최근에는 이형자리스트에 올랐던 김중권대통령비서실장, 천용택국가정보원장, 박지원문화관광부장관 부부가 이형자리스트를 공개거론한 한나라당 이신범의원을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이번 기회에 리스트의 폐해를 근절하겠다며 철저한 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각종 리스트는 과연 어디에서 발원해 어떤 경로를 거쳐 유포될까. 가장 최근에 문제가 됐던 이형자리스트를 폭로했던 이신범의원은 리스트를 접하게 된 경위에 대해 “국회의원회관 우체함에 꽂혀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의원이 출처를 감추기 위해 둘러댄 말일 수도 있지만 이의원의 말대로라면 리스트의 최초발원지는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한 셈이다. 그러나 이의원이 이형자리스트를 접하기 며칠 전부터 똑같은 내용의 리스트가 서울 여의도의 정가와 증권가에 나돌기 시작했던 점으로 미뤄볼 때 이의원도 어떤 경로를 거쳤든 루머성으로 나돌던 이 리스트를 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 검찰관계자는 이형자리스트의 기초가 됐을 이런저런 소문과 의혹의 발원지는 결국 이 씨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 씨 주변인물들이 이 씨가 권력실세 부인들과 가깝다는 식의 과시용발언을 한 것이 서너 단계 거치며 처음의 얘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질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예를 들어 이 씨 주변의 누군가가 고급 옷 같은 게 선물 축에 끼겠느냐. 돈 많은 사람들은 종종 고가의 골동품 같은 것을 선물한다더라는 말을 했고, 이런 말이 ‘이 씨가 미술을 전공해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등의 다른 말들과 결합해 그럴싸하게 포장됐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체 정보맨들의 시각은 다르다. 이들은 이런 리스트들이 서너 단계를 거쳐 떠도는 얘기를 종합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절대로 소설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이 같은 리스트를 생산해 내는 것으로 알려진 사설정보팀은 대부분 청와대 국가정보원 검찰 등 권력기관과 연결이 돼 있으며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이다. 기업체 정보맨들 사이에서 비교적 베테랑으로 꼽히는 한 대기업 정보팀의 H 씨는 “정태수리스트나 김선홍리스트, 배종렬리스트 등은 사정기관에서 목적을 갖고 흘렸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형자리스트에 앞서 나돌았던 최순영리스트 역시 사정기관에서 조종한 흔적이 엿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순영리스트는 5월 말부터 최근까지 모두 4가지 종류가 나돌았는데 최초에 유포된 리스트에는 야당의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권 실세들의 이름이 추가됐다는 것. 즉 최순영리스트가 처음에는 야당의원 겁주기 차원에서 유포됐다가 그러한 의도가 드러나자 나중에 물타기용으로 여권 실세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추가된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그의 주장처럼 어떤 리스트들은 뚜렷한 목표와 의도를 갖고 퍼뜨려지기도 했다. 98년 2월 초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나돌았던 5가지 종류 의 안기부 살생부리스트는 구 안기부 내의 핵심라인에서 소외됐던 인사들이 명백한 의도를 갖고 조직적으로 유포했던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리스트가 정가와 증권가에서 구전(口傳)되는, 근거가 박약한 소문들을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신빙성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리스트로 작성되기 이전의 소문이나 의혹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부풀리기와 끼워 넣기 등 윤색작업이 이뤄지고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소위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종합돼 문서화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987, 8월에 정치권 내부에서 맹위를 떨쳤던 사정(司正) 대상 정치인 리스트의 경우도 국회의원 보좌진이나 정당의 기획조정국, 정세분석위원회 등에서 사설정보지 등을 통해 수집한 소문을 토대로 정보보고용으로 재작성된 뒤 다시 정보시장으로 유통돼 수정판이 나오고 이 수정판은 다시 정치권으로 유통되는 식의 변질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다. 더욱 심각한 것은 리스트로 문서화된 갖가지 의혹과 소문들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엄밀한 검증과정 없이 종종 의혹제기라는 형식으로 공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야당중진의원들이 무더기로 거론 됐던 사정대상 정치인 리스트는 98년 정기국회에서 여당 국회의원에 의해 검찰의 엄정한 수사촉구라는 주문과 함께 공개 거론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이번 이형자리스트는 거꾸로 야당의원에 의해 역시 엄정한 수사촉구라는 이름 아래 공개됐다. 이러한 리스트들은 대부분 그 진실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항상 의문부호만 남긴 채 소멸하곤 한다. 최소한의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이 리스트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패 구조와 그에 따른 불신에서 비롯된 것일뿐더러 그 결과 역시 또 다른 불신의 재생산이다. 국정원이 5월 말 경 사설정보시장을 내사했고 검찰도 유언비어성 리스트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의혹이 설자리가 없는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횡행하는 리스트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