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공부? 게임 한판하고요”
1999. 6. 2. 한겨레신문
“영어시간에 nuclear(핵) 같은 ‘스타’(인터넷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아이들은 이렇게 부른다)와 관련된 단어만 나와도 교실이 시끄러워져요. 근데 선생님들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조용하라고만 해요. 교무실 가보니 선생님들은 벽돌 깨기나 하고 있더라고요. 나 참 시시해서….” 김재원(17․경기 분당 이매고 3)군과 박인걸(18․〃)군이 전한 이 말은 컴퓨터게임이 요즘 아이들의 일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미성년의 이름은 모두 가명. 기사를 본 어른들에게 ‘깨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재원이는 얼마 전 영화 <쉬리>를 보면서도 비슷한 전투장면이 많이 나오는 시뮬레이션게임 ‘레인보 6’를 떠올렸단다. “게임이 젤 재밌어요. 텔레비전은 그냥 가끔 봐요. 누가 야자(야간자습) 빼먹고 텔레비전 보러 가겠어요? 비디오방? 그런 데 안 가요.
영환 아주 좋은 거 있을 때 가끔 봐요.”(박인걸). 영화나 당구는 친구들끼리 할 얘기가 별로 없단다. “재밌냐?” “이겼냐?”하면 끝이란다. 하지만 ‘스타’ 같은 게임은 할 얘기가 무궁무진. “그때 왜 도와주지 않았냐?” “그 단계는 어떻게 넘어가니?”…. ‘게임세대’가 몰려온다. 기존의 영화․티브이세대와는 대화의 주제는 물론 취향과 감성도 다르다. 하기 전엔 충동, 할 땐 재미, 하고 나면 후회…. 스스로도 ‘중독성’을 인정할 만큼 게임은 이들에게 매혹적이다. “이제 피시게임 새로 나와도 안 배울래.” 경기도 분당 이매고등학교 3학년 어느 반. 아이들은 입시 준비에 전념해야 한다며 다짐했다. 그러나 맹세도 한때. 교실 한구석에선, “근데 말이야, 머잖아 ‘커맨드 앤 컨커Ⅱ’(인터넷 전략시뮬레이션게임)가 나온다며? 그게 엄청 대작이라던데….” 재원이와 인걸이는 좀 더‘현실적’인 다짐을 했다.
학기 초에 주말에만 게임방 가기로 하고, 평일에 가면 한 번에 3천 원씩 벌금을 내기로 했다. 재원이는 그럭저럭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인걸이가 문제다. ‘유혹’을 이기지 못해 평일 ‘야자’를 ‘땡땡이’ 치고 게임방에 갔다 번번이 ‘적발’된 것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대략 초등학생에서 30대 초중반까지다. 살아온 과정은 다르지만 어려서부터 게임을 생활의 일부로 즐겨왔다는 점에서는 같다. 우리 반 애들 거의 다 해요. 난 학원 가야 하는 화․목․토요일 빼고 날마다 연대 앞에 가서 두 시간씩 해요. “ (최준영․13․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금란중1).”친구 중에 스타 하는 애들 많아요.“(윤필상․8․서울 중랑구 신내동 봉래초등 3). 인터넷 신비로게임동호회 시솝 권성욱(28․항공사 근무)씨는 ”회원이 5천 명 남짓되는데, 직장인도 꽤 많다 “고 말했다. 관심은 공동체 형성과 새로운 꿈 꾸기로 이어진다.
장인수(14․부산 주례중 2)군은 ‘엠엘에프에이’라는 ‘84~86년생 길드(길드’는 일종의 스타크래프트 동호회)를 만들어 회원들과 게임 공략법도 상의하고 편을 짜 실전을 치르기도 한다. 인터넷에는 길드 홈 페이지가 수없이 많다. 아예 게임개발자가 되려는 아이들도 많다. 게임 개발업체 밀레니엄소프트 이은조 사장(30)은 ”게임 개발에 관심 있는 중고등학생이 생각보다 많고, 수준도 현직 개발자들 뺨칠 정도“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열광하냐고? “게임은 직접 참여할 수 있어 좋아요.” 건설 시뮬레이션 같으면 내가 도시를 직접 세울 수 있어요. 스타만 해도 짜내야 하는 전략이 끝이 없어요.“(김재원). 주정규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컴퓨터게임학)는 그 이유를 게임의 상호 작용 적 특성”에서 찾았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게임의 힘은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해 직접 참여하며 구실을 수행한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동일시 구조’에서 나오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시장조사 전문업체인 주피터커뮤니케이션스는, 국내 네트워크게임 인구는 97년 371만 명, 99년 721만 명에서 2002년 2682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집계했다. 여기에 가정용 비디오게임과 오락실용 아케이드게임, 오프라인 피시게임 등을 계산에 넣으면 게임인구의 저변은 훨씬 넓어진다. <문화과학> 편집위원 홍성태 씨는 “한국에서 게임세대라는 개념을 쓸 수 있다면 그 상한선은 80년대 초반 갤러그를 즐겼던 30대 초중반일 것”이라며 “스타 현상은 광범한 게임인구층의 존재를 입증해 준 것”라고 말했다. ‘스타크래프트는 확장팩 브루드 워’를 더하면 55만여 카피가 팔렸다. 김종엽 교수는 “영화가 그랬듯이 게임도 고급/저급문화의 벽을 허무는 첨병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전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제 단골 게임방은 안녕! 멀티미디어가 잘 돼 있는 우리 대학으로 오세요. 기숙사에도 랜이 깔려있습니다. 지난 3월 각 고등학교에 뿌려진 한 대학 홍보물의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