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사형을 사형시켜라
1999. 6. 10. 뉴스플러스
‘범죄 예방을 위한 필요악’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라는 상반된 주장이 팽팽히 맞서온 사형제도 존폐론이 다시 불붙었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사형폐지운동협의회(회장 이상혁변호사, 이하 사폐협)는 5월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념식을 겸한 학술 세미나를 갖고 한동안 잊고 있던 사형폐지 논의를 수면 위로 다시 부상시켰다. 이와 함께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3월부터 사형제도폐지를 위한 1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 현재 2만 8000여 명의 서명을 받은 상태. 특히 가톨릭계는 사형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위해 대희년인 2000년 한 해만이라도 사형집행을 유예하자는 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형폐지 문제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89년 5월 사폐협이 결성된 이후.
이전까지의 논의는 주로 종교계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사폐협은 70년대와 80년대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에 대한 교화활동에 참여해 온 자원봉사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 창립 이후 사형수에 대한 집행이 있을 때마다 법무당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간의 사폐협 활동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일궈내진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모두 8차례에 걸쳐 96명에 대해 죽음의 의식이 지속돼 왔던 것. 발족 3개월 만인 89년 8월4일 7명의 흉악범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듬해 4월에 9명이 집행된데 이어 다시 12월, 5명의 확정사형수 목에 밧줄이 걸렸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 선포 직후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실시된 12월의 사형 집행 직전엔 이례적으로 ‘망나니 잔치’를 예고해 사폐협 관계자들을 아연케 했다.
가장 많은 인원이 사형당한 것은 97년 12월 30일의 23명. 이들을 포함해 김영삼 정권시절 모두 57명에게 사형이 집행돼 6 공화국 기간의 39명 기록을 넘어섰다. 이처럼 사형폐지운동이 기존의 법체계를 고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허송세월한 것도 아니다. 96년 11월 사형제도를 규정한 형법 250조에 대해 사폐협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헌재는 ‘사형이 다른 생명 또는 그에 못지않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한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합헌결정을 내렸다. 주목할 점은 이 결정과 함께 헌재가 소수의견으로나마 위헌성을 인정했다는 것. 당시 김진우 조승형 두 재판관은 “모든 기본권은 생명이 있음을 전제로 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생명권은 어떤 법률과 제도에 의해서도 박탈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89년과 90년 제기된 별도의 헌법소원에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기도 전에 청구인들에게 사형이 집행됐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더욱이 최근 들어 일반인 사이에서도 사형폐지론은 이전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 94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조사자의 70%가 사형제도의 유지에 찬성했다. 그러나 올 5월 유니텔이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49.1%로 낮아졌다. 물론 각각의 여론조사가 동일한 방법과 모집단을 전제한 것이 아니어서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사형제도의 폐지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사회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사형제도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 변화는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사형폐지는 이미 ‘대세’다. 국제사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99년 4월 현재 전 세계에서 사형을 폐지한 국가는 모두 105개국(전면폐지국가 68, 군법이나 전시가 아닌 일반범죄에만 폐지국가 14 10년 이상 집행하지 않은 사실상 폐지국가 23). 물론 나머지 90개국에서는 여전히 사형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이들 국가가 내놓는 사형제도 존치의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의 법감정상 시기상조라는 것.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대통령은 작년 9월 피에르사네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과 만나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를 반대하지만, 현 정부가 사형제도를 논의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평민당 총재시절인 지난 89년 “법의 지상목표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는 것인데, 사형제도는 이 취지에 어긋나므로 폐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형폐지론자들의 논거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생명의 불가침성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뿐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도 포함돼 있다.
김일수고려대법대교수는 “재판에서의 오심(誤審)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이 사형당할 가능성과 정치적 악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는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관련, 과거 인혁당사건으로 ‘사법 살인’을 당한 피해자들이나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대통령의 경우를 생각해 볼 것을 주문한다. 또 이상혁변호사는 “사형의 범죄 억제력이란 ‘미신’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한다. 죄를 지으면 목숨을 빼앗겠다’는 위협이 흉악범죄를 예방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거꾸로 사형제도를 폐지했다고 해서 범죄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지난 86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판결을 받고 무기로 감형되기까지 2년 3개월을 사형수로 지냈던 김성만 씨의 경험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하루하루의 그 피 말리는 심정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사형수 생활을 소개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야 한다는 슬픔과 형집행에 대 한고통에 가까운 극단적 공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를 자문자답한다. 이 과정을 통해 사형수들은 누구의 지시 없이도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같은 폐지론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적 살인’이 중지되기 위해서 논리에 앞서 국민의 법감정이란 또 다른 장벽을 넘어야 한다. 비록 사형제도가 ‘합리적 형벌관이 확립되지 않은 원시사회의 응보형 유물’ 임을 인정한다 해도 가해자의 생명권이 피해자의 생명권보다 존중될 수 없다는 주장은 나름의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 쉽게 말해 폐지론자들도 “당신 가족이 흉악범에게 피해를 보았다면 그냥 있겠느냐”는 공박에 답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이것이 사회정의다. 그런데 그 처벌이 생명을 영원히 박탈하는 것이라면?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