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가장 고집 센 北 간첩 석방
뉴스위크 한국판 1999. 3. 10.
옛 동지들은 의기양양하게 대전 교도소 문을 나서며 서로 팔짱을 꼈다. 세계 최장기 복역수로 알려진 우용각(70)이 앞장을 섰다. 지난주 석방된 모든 미전향 장기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죄목 역시 양심죄였다. 독방에 수감된 41년 동안 그는 좌익이념의 포기나 북한 공산 독재정권에 대한 비난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랬더라면 자유의 몸이 됐을 텐데도 말이다. 지난 58년 남파됐다 체포된 그는 앞으로 통일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교도소밖에 모인 인권운동 관계자들과 운동권 학생들에게 “수십 년 동안 한 데서 지내다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돼 무척 기쁘다”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 1970년 이전에 체포된 남파간첩 17명을 석방했다. 이들의 복역햇수를 합치면 5백 년이 넘는다. 박상천(朴相千) 법무장관은 이를 두고 “비인도적”이라고 표현했다. 이들 미전향 장기수는 아직 수감 중인 20명의 동료 간첩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에 대한 준법서약을 거부했다.
런던에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의 맥베이는 “이들 정치범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고 정상의 경우보다 훨씬 장기간 수감됐다. 공산주의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방이 거부돼 왔다”라고 말했다. 禹는 동해상에서 보트를 타고 잠입하던 중 체포됐다. 김일성(金日成) 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8명의 간첩을 이끌고 남파됐다. 그의 임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남파간첩들은 대체로 정찰․파괴 활동을 하거나 한국의 친미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조직했다. 그들은 일단 체포되면 가혹하게 다뤄지고 때론 처형되기도 했다. 禹는 약식 군사재판에서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독방에 수감됐다.
다른 대다수 남파간첩 복역수들과 마찬가지로 禹는 난방시설이 없는 벽장만 한 독방에서 지냈다. 상대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호사(好事)라면 매일 운동장으로 나가는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재소자들은 30분 동안 걸으면서 다른 죄수들과 어울렸다. 禹가 역시 미전향 장기수인 최선묵을 만난 것도 운동장에서였다. 崔는 친척 방문을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잠입한 혐의로 체포돼 37년간 복역한 뒤 지난주 석방됐다. 인민군 출신 전쟁포로 함세환(69)도 장기복역수였다. 咸은 “모든 재소자는 비인간적 대접을 받았다. 자주 맞았고 먹을 것도 모자랐다”라고 말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이번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 조치는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대통령 선거 공약을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한 일각의 불만에 화답한 것 같기도 하다. 인권운동 단체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부당하게 투옥된 학생과 노동운동가가 약 2백30명이라고 주장했다. 사면 발표 이후 북한 정권은 모든 북한인 억류자들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金대통령은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상호교환’의 필요성을 강조, 소위 ‘햇볕정책’이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수감자 교환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한국 정부는 현재 남한주민 4백40명(대부분 나포된 상선 승무원)이 납북돼 있고, 또 2백34명의 한국전쟁 포로가 북한의 감옥이나 노동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禹는 남북한 협상이 이뤄져 북한의 처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양측이 인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잘 해결하기 바란다”라고 그는 말했다. 수감자 석방 외교는 전에도 참담하게 실패한 바 있다. 93년 취임 직후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은 화해 제스처로 이인모(70)를 북한에 송환했다. 李는 북측의 열렬한 환영 속에 영웅 대접을 받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에 대한 답례는커녕 李를 북한 전역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강연을 통해 남한 교도관들의 만행을 비난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자세히 열거하며 한국 정부를 美 제국주의의 괴뢰정권으로 매도했다. 李는 지금도 북한 주민을 상대로 연설을 다닌다. 그에겐 곧 동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