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cs 2024. 3. 2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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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는 구촌 준어?

 

뉴스플러스 1999. 3. 11. 

 

971월 중국이 대만 부근 해역에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동아시아 지역은 돌연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고, 수많은 인터넷 이용자들은 아시아 정세를 다루는 여러 온라인 뉴스그룹으로 몰려들었다. 곧 토론자들끼리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중국의 계획을 비난하던 한 토론자가 갑자기 이렇게 비아냥댔다. “나도 당신들이 엄청나게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신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영어교육인 것 같다. 중국인들은 영어 철자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나?" 다른 토론자가 즉각 감정적으로 되받았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너희 미국보다 훨씬 더 커져 봐. 중국인들의 문자 해득력이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높아져 봐. 그때는 우리 중국식 영어(Chinese-English)가 당신네 개떡 같은 양키 영어보다 훨씬 더 널리 쓰이게 될걸.” 이후 양안(兩岸)을 감돌던 전운은 가라앉았고, 이들의 온라인 싸움도 시들해졌다. 그러나 인터넷 가상공간의 전운은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영어와 비(非) 영어, 혹은 영어권 문화와 비영어권 문화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면서 여전히 삐그덕 대고 있다. 영어를 모르면 인터넷에서도 괴롭다. 단순히 정보를 얻고 해석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또 다른 정보원()인 뉴스그룹에 참여하는 것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설령 참여한다고 해도 주제와는 동떨어진 영어실력 때문에 핀잔을 듣거나 소외되기 십상이다. 영어가 현실사회의 공용어로 행세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세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5억 명이 영어를 쓰고 있으며, 나머지 4분의 3에서도 그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 신문, 잡지, 항공관제, 국제 무역, 학술회의, 스포츠, 외교, 대중음악, 광고 등 영어의 영향력은 실로 전방위적이다. 단순히 인구로만 따지면 중국어에 이어 세계 제2위지만 실제 쓰임새는 그와 견줄 바가 못된다.

 

미 시카고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에얌바 보캄바 박사는 인류 역사상 영어만큼 많은 나라와 지역으로 확장된 언어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영어의 위세가 세기말로 갈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1억 50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갖게 된 인터넷 때문이다. 60년대 말 미국으로부터 태동했다는 인터넷의 출신 성분만 본다면 그 주축 언어가 영어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넘도록, 특히 급속한 대중화 바람을 타고 매년 100% 이상의 증가세를 보여온 90년대 이후에도 영어의 지배력이 요지부동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재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8085%는 영어다. 그 비율은 2~3년 전보다 7, 8% 떨어졌지만 그 지배력만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순수 민간기구인 인터넷 소사이어티'의 연구 결과는 인터넷의 영어 중심주의를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무작위로 뽑은 3239개의 인터넷 홈페이지 가운데 2722개가 영어로 돼 있었다. 84%. 4.5%를 기록한 2위 독일어보다 20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보캄바 교수는 영어가 결국 다른 언어들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라면서, 현재 중국에서 200여만 명의 교사들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든다. “중국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 국제문제에 관여하는 일이 늘면서 영어에 대한 수요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그는 전망한다. 언어는 단순한 미디어나 기호체계, 혹은 코드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영국 브리스톨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앤드루 우드필드는 사멸 위기에 놓인 언어의 보존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언어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문화적 전통, 생활 및 표현방식, 문화적 동질성 등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썼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비영어권 나라들이 인터넷에 대해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전파하는 또 다른 도구라며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자국 문화에 대해 드높은 자긍심을 자랑해 온 프랑스의 경계심은 특히 더 높다. 프랑스는 영어 중심의 인터넷이 자국 문화를 파괴할지 모른다며 높은 담을 쳤다. 싱가포르는 인터넷에 만연한 개인주의와 저질 문화가 자국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할 위험성이 있다며 인터넷의 정치 및 종교 관련 정보를 검열하고 있다. 중국은 인터넷이 국내 반체제 인사들의 무기로 전용되거나 자국 국민 사이에 자본주의적 가치를 전파할 수 있다며 엄격한 통제정책을 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은 인터넷이 서방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퍼뜨리는 도구라며 그에 대한 정보검열과 통제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들 나라로서는 정보고속도로건설에 뒤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자국 언어나 문화에 미칠 파장을 뒤로한 채 인프라 구축에 열중하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들이 이상하게 비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대세다. 이미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네트워크, 인류 지식의 집산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들 나라의 대응이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디어 바이러스’ ‘사이베리아’ ‘카오스의 아이들같은 저서를 통해 뉴미디어 환경과 문화에 천착해온 인터넷 전문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그에 대해 인터넷의 본질과 특성에 무지한, 혹은 그를 무시한 실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터넷의 뿌리가 미국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인터넷은 미국적인 것이라는 논리와 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면서 미국이 인터넷화 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이야말로 가장 반제국주의적인도구다. “인터넷은 권력집중이 아닌 분산형이므로 소수 언어나 비영어권 국가들도 얼마든지 그 나름의 정보와 문화를 생산, 유통시킬 수 있다. 인터넷은 오히려 사멸하거나 박제화 될 위기에 놓인 언어나 문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도구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미 서머언어연구소에 따르면 세계 228개국에서 통용되는 6700여 언어 중 절반 이상이 2050년 안에 사멸할 운명이다. 인터넷은 이를 가속화할 것인가, 아니면 막거나 둔화할 것인가. 열쇠는 양날의 칼인 인터넷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달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