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국민 80% “차기 지도자 안 떠오른다”
한국일보 2004. 01. 01
절망일까, 혼돈일까
〈한겨레〉가 ‘미래의 정치지도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을 물었더니, 1000명 중 801명이 ‘없다’ 거나 ‘모른다’ 거나 응답을 하지 않았다. 정치지도자라면 자신의 삶과도 떼어놓기 쉽지 않을 터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이런 ‘침묵’ 은 우선 현실 정치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냉소로 읽힌다.
‘차떼기’ 등으로 정신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대선자금 문제는 ‘뭐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또는 ‘2 급수와 4 급수’ 논쟁을 일으키며 모든 정치인들에 대한 짙은 불신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이런 불신의 시대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거나, 희망을 걸어볼 만한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 란 여간해선 찾기 어려운 게 당연해 보인다.
2003년 한 해는 30년 동안 한국 정치의 지배질서를 형성해 온 세 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가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맞은 첫해였다. 싫든 좋든 익숙해 있던 세 사람의 리더십은 급격히 빠져나가고, 새로운 지도력은 그 빈 공간을 아직 메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치는 그 진공상태가 만들어낸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군웅이 활거하고 있으나, 다 ‘도토리 키재기’ 다. 누가 대중들의 마음을 빨아들일지 섣불리 예측하기 힘든 과도기다. 일반 국민들은 그런 혼돈 속에서 아직은 관망하고 있는 것이다.
물음에 충실히 응답해 준 나머지 20%의 답변 내용에서도 일정한 경향성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래도 10명 이상의 호응을 받은 정치인을 보면 이회창(51) 추미애(19) 정동영(17) 노무현(12) 최병렬(11) 김대중(10) 전두환(10) 차례다. 그 뒤를 이어, 5명 이상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정치인은 조순형(9) 정몽준(7) 김근태(7) 이명박(7) 강금실(6) 김민석(6) 권영길(5) 박근혜(5)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김대중,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현실 정치에서 몇 걸음 물러나 있는데도 미래의 정치지도자로 꼽힌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회고적 선택을 한 경우로 해석된다. 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1위로 선택된 것은 그에 대한 정치적 미련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추미애․정동영 두 젊은 의원은 다른 지표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전히 만만찮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미래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어떠한 자질과 품성을 키워야 하는 것일까
이를 묻는 주관식 질문에는 ‘정직한 사람’부터 ‘국운이 있는 사람’까지 다양한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유형별로 범주화하면 최고의 덕목은 ‘정직’이었다. 1000명 중 296명이 정직한 사람, 강직한 사람, 솔직한 사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 등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정직을 제일로 꼽았다. 특히 40대(34.8%,)와 50대(32.3%)가 이 덕목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다음으로는 깨끗함과 도덕성(154명), 리더십(153명), 헌신성(143명), 소신 있는 사람(110명), 사려 깊고 포용력 있는 사람(97명) 차례였다. 이에 비해 경제문제 해결 능력(72명), 식견과 능력(38명), 복지와 빈부격차 해소(10명)는 뒤로 밀렸다. 동양적이고 고전적인 덕목들이 이른바 ‘전문성과 개혁성’ 보다 여전히 우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는 전문가 그룹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가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인물’을 선정하면서 분야별로 3~5명씩 모두 48명의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본 결과, 정치 분야에서는 도덕성․깨끗함․헌신성․진정성 항목이 38건으로 가장 높았고, 포용력․갈등조정․통합력이 28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
역시 일반 국민들처럼 ‘덕’ 중심의 고전적인 가치들을 가장 높게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반 국민들은 거의 꼽지 않았던 남북 화해․한반도 문제 비전이 17건으로 3위를 차지했다.
또 이 항목에서는 여야 구분이 없었다.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과 자기 헌신성이 투철하고 남북 화해와 한반도 통일을 위한 국제적 리더십을 갖춘 사람”을 요구했고, 박진 한나라당 대변인도 “지역감정을 초월한 통합의 리더십,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최고의 자질로 꼽았다.